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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오가해 설명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09-01-13 (화) 11:12 조회 : 2102

금강경


금강경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金剛般若波羅蜜經)]의 약칭으로 [금강반야경]이라고도 한다. 이 경은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에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해공(解空) 제일이라고 불린 수보리존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 적에 그 마음을 어떻게 간직하고, 항복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은 데 대해 설한 것으로, 원시불교의 연기관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반야경]의 핵심이 되는 공(空)사상이 그 주축이 되어 있다.
구마라즙 삼장법사 이래 선종 교종을 통틀어 범종파적으로 금강경이 경전 가운데 제일 많이 독송, 연구된 이유도 이런 점에 있다 할 것이다. 특히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금강경이 보조스님 이후 지금까지 종단의 지도이념으로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다. 보조스님의 으뜸제자인 진각국사는 “제불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모두 금강경에서 나왔다”고 [진각집(眞覺集)]에서 설하고 있다.
선종과 금강경은 아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선종의 주안점이 반야안(般若眼)의 획득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종 육조인 혜능대사가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는 금강경 사구게를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아, 5조 홍인대사를 찾아가고 있다. 육조가 오조에게 금강경을 통한 전법인가를 받은 이래, 금강경은 선종의 소의경전이 되었다.



금강경오가해


금강경은 중국에서 번역된 뒤로 지금까지 동아시아 불교권에서 종파와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중요하게 신봉되어 왔으며, 선종 육조인 혜능대사에 의하면 그때까지 알려진 주석서만도 800종이 넘었다고 한다. [금강경오가해]는 그 많은 주석서 중에 다섯 분의 주석을 뽑아서 묶어놓은 것이다. 많은 주석들 중에서 저마다 개성이 다른 다섯 분의 주석을, 누가 언제 무슨 의도로 골라 편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여섯 분 주석가들은 다음과 같다.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당나라 스님. 어려서부터 유교와 불교를 배우고 28세에 도원선사(道圓禪師)를 만나 출가하였다. 원각경(圓覺經)에 정통하였고 징관(澄觀)의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읽고 감동받아 그에게 화엄학을 배웠다. 종남산(終南山) 초당사(草堂寺)에 머물며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선교일치를 제창하였다.
육조혜능(六祖惠能, 638~713); 당나라 스님. 선종 제6조. 홍인대사(弘忍大師)에게 은밀히 법을 전해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 10여 년을 은둔하다가 광주(廣州) 법성사(法性寺)에서 삭발하고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그 뒤 남쪽 여러 곳을 돌며 선풍을 크게 펼쳤다. 그의 설법을 제자들이 엮어 만든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전해진다.
부대사(傅大士, 497~569); 양(梁)·진(陳) 때의 재가의 거사. 쌍림대사(雙林大士) 혹은 동양대사(東陽大士)라고도 불렸다. 양무제(梁武帝)에게 존경을 받아 534년에 입궐하여 그에게 법을 설하였다. 540년에 송산에 쌍림사를 짓고 살면서 대법회를 개설하고 대장경을 넣어두는 윤장(輪藏)을 만드는 등 교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저술로는 선혜대사어록(善慧大士語錄)이 있다.
야부도천(冶父道川); 송(宋)의 스님. 속성은 적(狄)씨, 이름은 삼(三)이며 그에 대해서는 생몰연대도 확실치 않고 금강경에 송을 붙인 것 외에는 별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
예장종경(豫章宗鏡); 그에 대하여는 금강경에 붙인 ‘제송강요(提頌綱要)’ 외에 알려진 전기가 없다.
오가해는 경문(經文) 뒤에 다섯 분의 주석이 달려 있는데, 경문을 끊어 읽는 데 다섯 분의 안목이 각기 달랐을 것이므로, 어떤 대목에는 어떤 분의 주석이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더러는 위치가 아래위로 조금씩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석은 규봉의 찬요(纂要), 육조의 해의(解義), 부대사의 찬(贊), 야부의 송(頌), 종경의 제강(提綱) 순으로 붙어 있는데, 왜 이런 순서로 배열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규봉이 첫머리를 차지한 이유를 짐작해본다면, 그의 조리 있는 문단 나누기가 경을 파악하는 데 나침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금강경오가해 · 설의


1417년(태종 17)경 무학(無學)대사의 상수제자인 함허득통스님이 금강경오가해 주석의 어려운 부분에 해석을 붙였는데, 이를 ‘설의’라고 하였다. 이 설의는 금강경과 오가해의 오묘한 경지를 남김없이 밝혀놓았을 뿐 아니라 한 차원 높은 교리체계를 실어주어 많은 [금강경] 주석서 가운데 금자탑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함허스님에 따르면 그는 오가해가 오랜 세월 유통되는 동안 판본이 불완전해진 것을 걱정하여 교감을 하고 설의를 붙였다고 한다. 군데군데 괄호 안에, 어떤 글자는 다른 본에 어떤 글자로 되어 있다거나 어떤 글자는 어떤 글자로 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붙은 교감주가 그의 작업이다.
교감을 하면서 “다른 판본들을 근거로 해서 빠졌거나, 잘못 들어갔거나, 순서가 뒤바뀌었거나, 틀린 곳들을 가려내고 여러 스승들께 질문해서 바로잡았으며, 다른 판본을 참고하지 않고는 한 글자도 임의대로 빼거나 더한 것이 없다. 의심스럽기는 하나 참고할 만한 다른 본이 없는 경우에는 뜻을 근거로 판단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수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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