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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식론(成唯識論, Vijñaptimātratāsiddhi-śāstra)』 해 제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12-12-31 (월) 19:06 조회 : 3008
『성유식론(成唯識論, Vijñ_aptimā_tratā_siddhi-ś_ā_stra)』 해 제.hwp (42.5K), Down : 110, 2012-12-31 19: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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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제

『성유식론(成唯識論, Vijñaptimātratāsiddhi-śāstra)』 10권은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Triṃśikā-vijñaptimātratāsiddhi-kārikā)』에 대한 호법(護法) 등 십대논사(十大論師)들 각각의 주석서를, 현장(玄奘)이 659년에 번역할 때 호법의 학설을 중심으로 합유(合糅)한 논서이다. 먼저 세친 및 십대논사들과 『성유식론』의 번역 경위를 살펴본 다음, 이 논서의 구성 체계와 내용의 개요(槪要)를 서술하기로 한다.

1. 세친(世親)의 생애

세친(400~480년경)은 산스끄리뜨로 와수반두(Vasubandhu, 婆藪槃豆)라고 하고, 구역(舊譯)에서는 천친(天親)으로 번역된다. 북인도 간다라(Gandhara) 국의 수도인 뿌루사뿌라(Purusapura)에서 바라문 출신의 국사(國師)인 까우시까(Kausika, 憍尸迦)와 위린찌(Viriñci, 比隣持)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 무착(無着, Asaṅga)과 아우가 있었는데, 성장 후 3형제가 모두 출가하였다. 형인 무착은 처음에는 화지부(化地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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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출가했다가 나중에 대승으로 전향하였다. 세친은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 출가했는데, 유부의 학설을 무조건 옹호․고집하지는 않았고, 다른 부파 특히 경량부(經量部)의 교의체계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그는 유부교학의 백과전서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 200권의 강요서(綱要書)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30권을 저술했는데, 이때 같은 주제에 관하여 유부와 경량부의 견해가 다를 경우, 보다 합리적이고 뛰어난 이론 쪽을 택하여 이른바 ‘이장위종(理長爲宗)’의 방침으로 해설했다.

부파교단의 거장이었던 세친이 대승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40대 말이나 50대 초 무렵에 형 무착의 간절한 권고 때문이었다. 세친은 대승교학의 깊고 광대함을 깨닫고 과감하게 대승교단으로 전향했다. 전에 대승을 비불설(非佛說)이라고 비방하던 과오를 깊이 뉘우치고, 그 대신 대승불교를 홍포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그는 설일체유부․경량부․승론파 등의 외경실재론을 논파하여 유식무경설(唯識無境說)을 천명했으며, 무착에 의해 조직된 유식교학체계를 정리․대성했다. 또한 유식교학뿐만 아니라 화엄․반야․법화․열반․여래장․정토 등 다방면의 경전을 알기 쉽게 해설하여 요강서(要綱書)를 제작․홍포했다.

세친의 많은 저서 중에서 현재 한역본 23부, 범본 7부, 서장본 21부가 남아 있어 그의 유식교학 체계를 전해 준다. 그의 현존 저서 중에서 한역본으로서 널리 알려진 것은 『아비달마구사론』 30권,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1권,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 10권, 『대승오온론(大乘五蘊論)』 1권, 『변중변론(辯中邊論)』 3권, 『불성론(佛性論)』 4권, 『십지경론(十地經論)』 12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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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대논사(十大論師)

세친은 식전변설(識轉變說)을 수립하여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와 8식(識)의 존재 양상 및 인식 성립의 역학적 구조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는 식전변의 원리를 『유식삼십송』에서 본격적으로 체계화시키고자 했으나, 이 저술을 만년에 지었으므로 미처 그 주석서를 남기지 못했다. 이후 많은 유식논사들이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서를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주석가를 ‘십대논사’라고 한다.

그런데 세친 이후 유식학은 크게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과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의 두 사조로 나뉘었다. 이 두 학풍은 이후 유식학의 전개 방향과 유식논사들의 학문적인 업적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선덕(先德)의 저술에 주석서를 제작하는 것이 이 시대의 학문적인 경향이었다. 『성유식론』에서 보이는 십대논사들의 견해 차이는 근본적으로 이러한 학풍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1) 호법(護法, Dharmapāla)

호법(530~561)은 남인도 드라위다 국의 깐찌뿌라 출신으로서, 매우 명석하여 대승교학뿐만 아니라 아비달마교학과 외전(外典)에도 능통했다.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뛰어난 언변으로써 사방(四方)을 주유하며 외도와 부파교단의 논사들을 상대로 자주 공개토론을 벌여 논파하였다. 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날란다Nālanda 대학의 학두(學頭)가 되어 유식학을 선양하며 승우(勝友)․최승자(最勝子)․계현(戒賢) 등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29세에 병이 들어 은퇴하여 대보리사(大菩提寺)에 머물면서 선정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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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유식삼십송』에 대한 주석서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호법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유식학을 발전시키고 선양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진나(陳那)의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의 취지를 이어 진보적․방편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호법은 종자설(種子說)에 있어서 호월(護月)의 본유설(本有說)과 난타(難陀)의 신훈설(新熏說)의 모순을 지적하고 종자본유신훈병유설(種子本有新熏竝有說)을 주장하였다.

호법의 학문적 업적 가운데 하나는 유식학의 인식구조론을 4분설(分說)로써 완성한 점이다. 원래 무착(無着)․세친까지는 인식성립의 역학적 구조를 ‘객관으로서의 식[有相識]’과 ‘주관으로서의 식[有見識]’으로 설명하였다. 진나(陳那)는 이를 보다 인식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자증분(自證分, 量果), 즉 식이 2분화(分化)되기 이전의 질료(質料)이면서, 동시에 객관으로서의 식[所量, 相分]과 주관으로서의 식[能量, 見分]에 의한 인식작용을 확인하는 작용 내지 인식결과로서의 자증분을 들고 3분설(分說)을 건립하였다. 호법은 진나의 이론을 발전시켜서 자증분의 확인 작용을 증명하는 제4의 작용인 증자증분(證自證分)을 설정한 4분설(分說)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자증분의 확인 문제 및 서로 확인 작용이 무한히 소급되는 이론적 모순을 해결했다.

그의 저술 중에서 현존되는 한역본으로는 『성유식론(成唯識論)』 10권, 『성유식보생론(成唯識寶生論)』 5권, 『관소연론석(觀所緣論釋)』 1권, 『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10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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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혜(安慧, Sthiramati)

안혜(510~570년경)는 남인도 랄라(Lala)국 출신이며, 왈라비(Valabhi)에서 덕혜(德慧)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다. 그는 주로 왈라비에서 활약했는데, 당시 그곳은 날란다사와 함께 유식학의 중심지로서, 전자는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 후자는 유상유식론(有相唯識論)의 학풍이 강했다.

그는 유식학뿐만 아니라 중관학․여래장사상 등 대승교학과 아비달마교학에 박식하였다. 또한 인명론(因明論)에도 통달하여 정리학파(正理學派) 등 외도와의 토론에서 그들을 항복시켰다고 한다. 안혜의 견해와 학문적 업적의 토대는 무상유식론(無相唯識論)이었으며, 유식사상을 선양하는 방법론에 있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당시 유식학파와 중관학파의 표면화된 사상적 대립을 극복하고자 했으며, 또한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의 융합을 도모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중변분별론석소(中邊分別論釋疏)』, 『대승장엄경론소(大乘莊嚴經論疏)』,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16권, 『대승광오온론(大乘廣五蘊論)』 1권, 『구사론실의소(俱舍論實義疏)』 등이 있다.

3) 친승(親勝, Bandhuśri)

세친과 같은 시대의 논사로서, 『유식삼십송』에 최초로 주석서를 지었다고 한다.

4) 화변(火辨, Citrabhāna)

세친과 같은 시대의 거사(居士)로서, 수행의 경지가 높고 문장에 뛰어난 저명한 주석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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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덕혜(德慧, Gunamati)

남인도 쁘라와따(Pravata, 鉢伐多) 출신이고, 안혜의 스승이다. 3장(藏)에 통달했으며, 일찍이 마가다(Magadha, 摩揭陀)국에서 수론외도(數論外道)를 항복시켜서 그 명성이 인도 천하에 드날렸다고 한다. 그의 저술로는 진제(眞諦)가 번역한 『수상론(隨相論)』 1권이 현존한다.

6) 난타(難陀, Nanda)

안혜와 같은 시대의 논사이다.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그는 심분설(心分說)로는 2분설(分說)을, 종자설에 있어서는 신훈종자설(新熏種子說)을 주장했다고 한다.

7) 정월(淨月, Sudhacandra)

안혜와 같은 시대의 논사이다. 『성유식론술기』에 의하면 심분설로는 난타(難陀)와 같이 2분설(分說)을 주장했다고 한다.

8) 승우(勝友, Viśeṣamitra)

호법의 문인(門人)이다.

9) 최승자(最勝子, Jinaputra:辰那弗多羅)

호법의 문인이며, 그의 저술로서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 1권이 현존한다.

10) 지월(智月, Jñānacandra:若那戰達羅)

호법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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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성유식론』의 번역 경위

1) 현장(玄奘)의 역경작업

현장(600~664)은 낙양 근처의 구씨현(緱氏縣)에서 출생하여 13세에 낙양 정토사에 출가했다. 그는 부처님의 성적지(聖蹟地)를 참배하고, 원전을 직접 연구함으로써 종래 한역본에서의 모호한 부분을 분명히 이해하며, 교학의 여러 분야에서 특히 유식교의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고자 인도에의 구법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629년(貞觀 3년)에 구법의 길에 올라 천신만고 끝에 이윽고 마가다국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이르러 호법(護法)의 제자인 계현(戒賢)에게서 수학했다. 또한 호법의 재가제자인 현감(玄鑑) 거사로부터 십대논사들의 주석본을 얻는 등 많은 범본(梵本) 경론을 수집하였다. 전후 17년에 걸친 유학을 마치고 마침내 645년(貞觀 19년)에 귀국하였다. 이후 입적하기까지 약 20년간 홍복사․자은사 등의 역장(譯場)에서 모두 76부 1,347권에 달하는 많은 경론을 번역하였다. 번역 분야는 유식․구사(俱舍)․반야․밀교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현장은 중국의 역경사에서 신역(新譯)의 대표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유식경론 번역에 의해 중국 유식교학의 학풍이 종래의 무상유식론에서 유상유식론의 흐름으로 전환되었다. 구역(舊譯) 유식경론의 대표자인 진제(眞諦)는, 인도에서 무상유식론의 조류를 대표하는 안혜(安慧)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 반면에, 현장은 유상유식론을 대표한 호법의 제자인 계현에게 수학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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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유식론』이 호법설 중심의 합유(合糅) 형식으로 번역된 경위

현장은 원래 『유식삼십송』에 대한 십대논사들의 주석본을 모두 번역하려고 했다. 그런데 신방(神昉)․가상(嘉尙)․보광(普光)과 함께 번역 작업을 돕기로 내정된 기(基)가 며칠 뒤에 홀로 현장에게 다음과 같이 청원했다고 한다. 원래 계획대로 할 경우 논서의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십대논사들의 견해가 서로 다른 부분들이 있어서 난해하므로, 호법(護法)의 학설을 정의(正義)로 삼고 다른 아홉 논사들의 주장을 취사선택하여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편집하자는 것이었다. 현장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여 다른 세 사람을 물리치고, 기(基) 한 사람의 도움 아래 659년(顯慶 4년)에 『성유식론』 10권의 번역을 완성하였다.

3) 법상종의 성립

현장의 유식경론 번역을 계기로 유식학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자은 기(慈恩基)의 『성유식론술기』와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에 의해 법상종의 교학이 정립되었다. 원래 법성상종(法性相宗)의 성격이지만, 법의 성(性)보다는 상(相), 즉 현상계를 중점적으로 설명하므로 법상종으로 명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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