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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61~70권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11-08-13 (토) 12:21 조회 : 2094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61~70권.hwp (574.9K), Down : 49, 2011-08-13 12:21:01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61~70권

법원주림 제 61 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68. 주술편 ②

감응연(感應緣)[대략 여덟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전주(前周)의 갈유(葛由)

진(晋)의 석기역(釋耆域)

진(晋)의 축불도징(竺佛圖澄)

진(晋)의 축법인(竺法印)

송(宋)의 석보의(釋寶意)

송(宋)의 석배도(釋杯度)

송(宋)의 석현창(釋玄暢)

잡속환술(雜俗幻術)

전주(前周)의 갈유(葛由)

전주(前州)의 갈유(葛由)는 촉강(蜀羌) 사람이다. 전주의 성왕(成王) 때에 그는 나무에 염소를 새겨 팔며 살았는데, 어느 날 아침에 나무 염소를 타고 촉중(蜀中)으로 들어갔다. 촉중의 왕후(王侯)와 귀인들이 모두 그를 따라 수산(綏山)으로 올라갔다. 수산은 아미산(峨嵋山) 서남에 있어 끝없이 높았는데, 따라간 사람들이 아마도 돌아오지 않았으니 모두 신선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里論)에 말하였다.

"수산에 나는 복숭아 하나를 얻으면 비록 신선은 되지 못하더라도 호걸은 될 수 있다."

수산 밑에는 사당을 세운 곳이 수십 곳이나 있다.[『수신기(授神記)』에 있다.]

진(晋)의 석기역(釋耆域)

?(晋)나라 낙양(洛楊)의 석기역(釋耆域)은 천축(天竺) 사람이다. 중국과 서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일정하게 사는 곳이 없었다. 뜻이 크고 재주가 뛰어나며 성질은 자유로워 갑자기 속인 행세도 했었다. 그 행적이 일정하지 않아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다.

천축(天竺)을 떠나 부남(扶南)으로 올 때는 여러 바다를 건너고 교광(交廣)을 지내면서는 여러 가지 신기한 행동이 있었다. 양양(襄陽)으로 와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 할 때 그 사공은 이 천축 사문의 누추한 옷을 보고 업신여겨 배에 태우지 않았는데, 배가 북쪽 언덕에 대었을 때에 기역은 벌써 거기 와 있었다. 길을 가다가 두 마리 호랑이가 귀를 눕히고 꼬리를 흔드는 것을 보고는 손으로 그 머리를 만지자 호랑이는 길에서 내려갔다. 양쪽 언덕에서 이것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 떼를 지어 그를 따라갔었다.

진(晋)나라 혜재(惠帝) 말년에 낙양으로 갔을 때는 여러 도인들이 다 그에게 예배했으나 그는 높은 자리에 걸터앉아 안색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전신(前身)을 말하였다.

"지법연(支法淵)은 염소 세계에서 왔고, 축법흥(竺法興)은 인간에서 왔다."

또 다른 스님들의 옷이 화려한 것을 비방하여 소법(素法)에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또 낙양의 궁성을 보고는 말하였다.

"저것은 마치 도리천궁(?利天宮)을 방불하는구나. 다만 자연의 일이 사람의 일과 다를 뿐이다."

그리고 기역은 사문 기암밀(耆闇密)에게 말하였다.

"저 궁전은 도리천이 내려와서 지어 놓고 올라갔다. 용마루 기와 밑에 1,500개의 그릇이 있을 것이다."

그 때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옛날 들으니 그 장인(匠人)이 그릇을 만들어 기와 밑에 두었다더라."

또 말하였다.

"궁전이 낙성된 뒤에 그 장인은 해를 입었다."

형양(衡陽)의 태수(太守)로 있는 남양(南陽) 등영문(?永文)이 낙양의 만수사(滿水寺)에 있을 때 병에 걸려 여러 해 동안 낫지 않고 두 다리가 오그라져 일어나 다닐 수가 없었다. 기역이 가서 보고 말하였다.

"당신은 병을 고치고 싶습니까?"

기역은 곧 깨끗한 물 한 잔과 버들가지 하나를 가져오게 하여 버들가지로 물을 친 뒤에 손을 들어 영문을 향해 주문을 세 번 외웠다. 그리고 영문을 붙잡아 일으키니, 영문은 곧 일어나 걷되 전과 같았다.

또 그 절에 있는 사유나무[思惟樹] 수십 그루가 말라죽어 있었다. 기역은 영문에게 물었다.

"저들 나무가 죽은 지는 얼마나 됩니까?"

영문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했다. 기역이 나무를 향해 위와 같이 주문을 외우니, 나무들은 곧 꽃이 피고 지엽이 무성했다.

상방서(尙方暑)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병이 들어 곧 죽게 되었다. 기역은 발우를 병자의 배 위에 놓고 흰 천을 그 위에 덮고는 수천 마디의 주문을 외웠다. 곧 더러운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하였다. 그러자 병자는 말하였다.

"나는 이제 살았다."

기역이 사람을 시켜 그 천을 들게 하자 발우에는 진흙 같은 것이 두어 되나 담겨 있었는데, 그 냄새가 고약해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고, 병자의 병은 말끔히 나았다.

낙양에 난리가 가까워지자 기역은 낙양을 떠나 천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낙양의 사문 축법승(竺法行)은 고승이었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시켜 기역에게 청하였다.

"상인(上人)은 도승이십니다. 한 말씀을 남겨 두어 우리의 영원한 경계로 삼게 하십시오."

기역은 대중을 모으라 하여 대중이 다 모이자 높은 자리에 올라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몸과 입과 또 그 뜻을 삼가

부디 어떤 악도 범하지 말고

일체의 선을 다 수행하라.

이렇게 하면 세상을 제도하리.

이렇게 말을 맺고 잠자코 있었다. 범행은 다시 청하였다.

"상인은 우리가 일찍이 듣지 못하던 말씀을 일러 주십시오. 그런 게송의 이치는 8세 동자도 다 이미 알고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인께 바라던 것이 아닙니다."

기역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8세에 외우더라도 1백 세에 행하지 않으면 외우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사람들은 다 도를 얻은 자를 존경할 줄은 알면서 그것을 행해 스스로 도를 얻을 줄은 알지 못하니, 그것이 슬픈 일이다. 말은 비록 적으나 이것을 행하면 이익이 많으니라."

기역은 이에 하직을 고했다. 수백 사람들이 모두 기역을 점심에 청했을 때 기역은 다 가기로 허락했다. 이튿날 점심 때 5백 사람 집에 모두 기역이 있었으므로 그들은 다 자기 집에만 기역이 온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서로 물어보고 비로소 기역이 몸을 나누어 간 줄을 알았다. 그가 떠날 때 여러 도인들은 그를 하남성(河南城)까지 전송했는데, 기역은 천천히 걸어갔으나 아무도 따르지 못했다. 기역은 이에 땅에 금을 그으면서 말하였다.

"여기서 이별합시다."

그 날 장안(長安)에서 오는 사람은 다 기역을 절에서 보았다 했고, 또 호습(胡濕)이라는 상인은 그날 저물 때에 기역을 유사(流沙)에서 만났다 했으니, 그 거리를 따져 보면 9천여 리를 간 셈이었다. 그는 서국(西國)으로 돌아간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진(晋)의 축불도징(竺佛圖澄)

진(晋)나라 업중(?中)의 축불도징(竺佛圖澄)은 서역 사람이며, 본성은 백(帛)씨이다. 젊어 출가하여 성질은 밝고 곧으며 학문에 힘써 수백 만언의 경전을 외우고 글과 뜻을 잘 알았다. 비록 중국의 유사(儒史)는 읽지 않았으나 여러 학자들과 변론할 때 의심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다 외워 틀림이 없었으므로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스스로 말하였다.

"다시 계빈국(?賓國)으로 가서 명사(名師)들의 강의를 받아 서역에서는 모두 도를 얻은 사람이라 한다."

진(晋)나라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에 낙양에 와서는 포교에 뜻을 두고 신주(神呪)를 잘 외워 귀신을 잘 부리며, 참기름에 연지를 섞어 손바닥에 바르고는 천리 밖의 일을 손바닥을 통해 다 보되, 마치 직접 보는 것과 같았으며, 깨끗이 재(齋)한 사람으로 하여금 다 함께 보게 했다. 또 풍경 소리를 듣고 앞날의 일을 말하되, 모두 영험이 있었다.

이에 초야(草野)에 숨어살면서 세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때 석륵(石勒)은 갈파(葛波)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오로지 사람을 죽임으로써 위엄을 떨치고 많은 사문들까지 해쳤다. 도징은 백성을 가엾이 여겨 도로써 석륵을 교화시키려고 지팡이를 짚고 석륵의 군문(軍門)으로 갔다. 석륵의 대장 곽흑략(郭黑略)은 본래 불법을 믿는 사람이므로 도징은 흑략의 집에 머물렀다. 흑략은 도징에게서 5계를 받고 제자의 예로써 도징을 섬겼다. 석륵은 도징을 불러 물었다.

"불법에 어떤 영험이 있는가?"

도징은 석륵이 깊이 이치를 깨닫지 못함을 알고 바로 도술로써 영험을 보이리라 생각하고는 곧 대답하였다.

"지극한 도는 비록 심원하다 하더라도 가까운 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도징이 곧 발우에 물을 담고 향을 피우며 주문을 외우자 발우 물에서 푸른 연꽃이 나와 그 빛이 눈을 부시게 했다. 석륵은 이것을 보고 감복했다. 도징은 석륵에게 간하였다.

"대개 왕의 덕화(德化)가 천하에 두루 퍼지면 4령(靈)이 상서를 나타내고, 정치가 사납고 도가 사라지면 혜패(慧?)가 뒤에 나타납니다. 항상한 상(像)은 현상을 보이고, 길흉(吉凶)이 행을 따르는 것은 곧 고금의 떳떳한 징조요 하늘과 사람의 밝은 경계입니다."

석륵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였으니, 무릇 죽임을 당할 사람으로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 18, 9인이었다. 그 뒤에 석륵은 분노하여 여러 도사들을 죽이려 하고, 또 도징도 괴롭히려 하므로 도징은 곧 흑략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만일 장군의 사자가 와서 내 있는 곳을 묻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라."

과연 사자가 와서 찾았으나 도징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가 석륵에게 보고했다. 석륵은 놀라면서 말하였다.

"내가 악의로 성인을 대했으므로 성인은 나를 버리고 떠났다."

석륵은 밤새껏 자지 못하고 도징을 만나기만을 생각했었다. 도징은 석륵이 후회함을 알고 이튿날 아침에 석륵에게로 갔다. 석륵은 물었다.

"어젯밤에는 어디 갔었습니까?"

도징은 대답하였다.

"당신이 성을 내었기 때문에 어젯밤에는 일부러 피했지만 지금은 당신이 마음을 고쳤기 때문에 감히 와서 뵈옵는 것입니다."

석륵은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도인이 잘못 생각했습니다."

양국(襄國) 성참(城塹)의 수원(水源)은 그 성의 서북쪽 5리에 있는 범란사(汎祀) 밑에서 흘러나오는데 그 물이 갑자기 말랐으므로 석륵은 도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물이 다시 나올 수 있게 하겠습니까?"

도징은 대답하였다.

"지금 곧 용에게 분부하십시오."

석륵의 자(字)가 세룡(世龍)이었으므로 석륵은 도징이 자기를 비웃는다 생각하고 말하였다.

"바로 그 용이 물을 내지 못하기 때문에 물었을 뿐입니다."

도징은 말하였다.

"내 말은 진실이요 농담이 아닙니다. 물 근원에는 반드시 용이 살고 있으니, 지금 가서 명령하시면 반드시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 법수(法首)와 몇 사람을 데리고 그 수원으로 갔다. 그 수원은 이미 다 말라 수레바퀴처럼 갈라져 있었으므로 존자들은 모두 물을 얻기 어려울까 염려했다. 도징은 승상(繩牀)에 앉아 안식향(安息香)을 피우며 몇 백 자의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3일 동안 계속 했을 때, 갑자기 물이 조금 흘러나오면서 길이 5, 6치쯤 되는 조그만 용이 물을 따라 기어 나왔다. 도사들이 모두 가서 이것을 보려 할 때 도징은 말하였다.

"용에게는 독기가 있으니 부디 가까이 가지 말라."

조금 있다가 큰 물이 흘러나와 성참이 다 찼으니, 도징의 이런 예언은 다 말할 수 없다.

석륵은 왕위에 오른 뒤로는 도징을 더욱 돈독히 섬겼다. 그 때 석총(石蔥)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 해 도징은 석륵에게 경계했다.

"금년에는 파에 벌레가 있어 그것을 먹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파를 먹지 못하게 하십시오."

석륵이 온 나라에 영을 내려 아무도 파를 먹지 못하게 했더니, 그 해 8월에 과연 석총이 달아났다. 석륵은 도징을 더욱 존중하여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징에게 물어본 뒤에 시행하고 대화상(大和尙)이라 불렀다.

석호(石虎)의 아들 빈(斌)은 뒤에 석륵의 아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갑자기 병이 나서 죽어 이틀이 지났다. 석륵은 석호에게 말하였다.

"짐(朕)이 들으니 괵() 태자가 죽었을 때 편작(扁鵲)이 살렸다 한다. 대화상은 우리 나라의 신인(神人)이라 급히 가서 알리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도징이 이 말을 듣고 곧 버들가지를 들고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빈은 깨어났고, 한참 있다가 아주 나았다.

석륵은 어린애들을 많이 절에 보내어 공양을 받게 했는데, 4월 8일에는 석륵이 직접 절에 가서 불상을 목욕시키고 아이들을 위해 발원했다. 건평(建平) 4년 4월에는 하늘이 고요하고 바람이 없었는데, 탑의 풍경이 혼자 울고 있었다. 도징은 대중에게 말했다.

"저 풍경 소리가 말하기를 금년 안에 나라에 큰 상(喪)이 있을 것이라 한다."

그 해 7월에 과연 석륵이 죽고 그 아들 홍(弘)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조금 있다가 석호가 홍을 폐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 도읍을 업(?)에 옮기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하고 마음을 다해 도징을 섬기기 석륵보다 더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렸다.

"대화상은 이 나라의 보배이다. 영화로운 벼슬도 받지 않고 높은 녹(祿)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와 녹을 기울이지 않으면 무엇으로 그 덕을 나타내겠는가? 지금부터는 비단으로 옷을 지어 입고 조각한 수레를 타고, 조회하는 날과 화상이 궁전에 오를 때는 상시(常侍) 이하는 다 수레를 메고 여러 태자는 부축해 오르게 하며, 주상(主上)이 '대화상이 오신다' 하고 외치면, 대중은 다 일어남으로써 그 존엄을 나타내게 하라."

또 영을 내렸다.

"위사공(僞司空) 이농(李農)은 아침 저녁으로 친히 가서 문안하고 여러 태자들은 5일에 한 번씩 문안하여 짐(朕)이 공경하는 뜻을 표하라."

그 때 도징은 업성(?城)의 중사(中寺)에 있으면서 그 제자 법상(法常)을 북방의 양국(襄國)에 보냈다. 제자 양기성(梁基城) 밑에서 함께 자게 되어 수레를 맞대고 밤을 새워 도징 화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른 아침에 각기 헤어져 길을 떠났다. 법좌가 돌아와 도징을 뵙자 도징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는 어젯밤에 법상과 수레를 맞대고 네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옛사람의 말에 '공경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그윽한 데서도 고치지 말라.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혼자 있어서도 게으르지 말라. 그윽하고 혼자임은 공경하고 삼감의 근본이다' 하였으니, 너는 이것을 모르는가?"

법좌는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면서 참회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늘 서로 말하였다.

"악심을 내지 말라, 화상이 너를 안다."

심지어 도징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바로 대고 침을 뱉거나 대소변을 보지 못했다.

그 때 태자 석수(石遂)의 두 아들이 양국(襄國)에 있었는데, 도징은 석수에게 말하였다.

"작은 아들이 요즘 병에 걸려 있을 것이니 곧 가서 데리고 오시오."

석수가 곧 사람을 보내어 가 보았더니 과연 앓고 있었다. 큰 의사 은등(殷騰) 및 외국의 도사들이 모두 자기네가 고칠 수 있다 했다. 그러나 도징은 그 제자 법아(法牙)에게 말하였다.

"만약에 성인이 다시 나오셔도 이 병을 고칠 수 없거늘, 하물며 저런 무리들이겠는가?"

3일 뒤에 과연 그는 죽었다.

그 뒤에 진(晋)나라 군사가 회사(淮泗)로 나와 농북(壟北)과 와성(瓦城)을 다 핍박하므로 3방에서 급함을 알려 인심이 매우 시끄러웠다. 이에 석호는 화를 내어 말하였다.

"나는 부처를 받들고 스님들을 공양했는데 이제 외구(外寇)의 침노를 받으니, 부처는 영험이 없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도징이 일찍 들어가자, 석호가 이 사실을 도징에게 물으니, 도징은 석호에게 간했다.

"대왕은 전생에 큰 상주(商主)로서 계빈사(?賓寺)에서 대회를 열었고, 거기 60명의 아라한이 있었는데, 이 미미한 나도 그 대회에 참여했습니다. 그 때 어떤 도인이 내게 '이 대회의 주인은 목숨을 마치면 닭으로 태어날 것이요, 뒤에는 진(晋)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했습니다. 지금 대왕은 주상이 되었으니, 어찌 복이 아닙니까? 국토에 도둑이 침입하는 것은 나라의 상사(常事)인데 왜 이로써 3보를 비방하면서 가만히 독심을 일으키십니까?"

석호는 이에 깨치고 꿇어앉아 사과했다. 일찍이 석호는 도징에게 물었다.

"불법에 살생하지 말라 했습니다. 짐은 천하의 주인이 되어 형벌과 살생이 아니면 천하를 숙청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미 계를 어기고 살생했거늘, 아무리 부처를 섬긴들 무슨 복을 받겠습니까?"

도징은 말하였다.

"제왕이 부처를 섬김은 몸으로 공경하고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3보를 선양하고 포학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흉악하고 우치하며 무뢰함에 이르러서는 교화가 아니고는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악이 있으면 형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죽여야 할 것을 죽이고 형벌해야 할 것을 형벌할 뿐입니다. 만일 마음대로 포악하고 법이 아니게 죽인다면 아무리 재물을 기울여 법을 섬긴다 해도 그 앙화는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욕심을 버리고 자비심을 일으켜 그것이 일체 중생들에게 두루 미치면 부처의 가르침은 길이 융창하고 복은 비로소 멀리 뻗을 것입니다."

석호는 비록 이대로 다 행하지는 못했으나 그 이익됨은 적지 않았다.

석호의 상서(尙書)인 장리(張離)와 장량(張良)은 집이 부자로서 부처를 섬겨 각기 큰 탑을 세웠다. 도징은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를 섬김은 청정하여 욕심이 없고 자비를 마음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단월(檀越)은 비록 겉으로는 큰 법을 받들지만 탐욕과 아낌이 다 없어지지 않아 사냥에 법도가 없고 재물을 쌓아 끝이 없습니다. 한창 현세의 죄를 짓고 있거늘, 어찌 복의 과보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장리와 장량 등은 그 뒤에 과연 죽임을 당하고 모두 망했다.

도징은 일찍이 그 제자를 서역에 보내어 향을 사오라 했다. 그가 떠난 뒤에 도징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손바닥을 보니, 향을 사러 간 제자가 지금 아무 곳에서 도둑을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도징은 곧 향을 피우고 주문을 외우면서 그를 멀리서 구원한다고 했다.

뒤에 그 제자는 돌아와 말하였다.

"아무 달 아무 날 아무 곳에서 도적의 겁탈을 당해 거의 죽게 되었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향기를 맡더니 도적은 아무 이유 없이 놀라면서 '구원할 군사가 왔다' 하고 달아나더라."

석호는 늘 연(燕)나라를 치려 하였으므로 도징은 간하였다.

"연나라는 그 운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끝내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석호는 여러 번 치러 갔다가 대패하고 비로소 도징의 충고를 믿었다.

또 황하(黃河)에서는 이전에는 자라[?]가 나지 않았는데 누가 그것을 잡아 석호에게 바쳤다. 도징은 그것을 보고 한탄하였다.

"환온(桓溫)이 물에 들어간 지 오래지 않았다."

환온의 자(字)는 원자(元子)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또 도징은 일찍이 석호와 함께 중당(中堂)에 오르다가 갑자기 놀라면서 마라였다.

"변변(變變)이다. 유주(幽州)에 큰 화재가 있을 것이다."

도징은 곧 술을 가져오게 하여 뿌리고는 한참 있다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불이 다 꺼졌다."

석호가 사람을 유주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아보았더니, 그는 돌아와 말하였다.

"그날 불이 사문(四門)에서 일어났는데 서남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소나기를 내려 불을 껐는데, 그 비에서 술냄새가 몹시 났다."

또 석호의 건무(建武) 14년 7월에 석선(石宣)과 석도(石韜)는 서로 석호를 죽이기를 도모했다. 석선이 절에 가서 도징과 같이 앉아 있을 때 부도의 풍경 하나가 혼자 울고 있었다. 도징은 석선을 보고 말하였다.

"저 풍경 소리의 뜻을 아십니까? 풍경 소리가 '오랑캐가 낙도(落度:구제받지 못함)한다'고 합니다."

석선은 얼굴빛이 변하며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이오?"

도징이 속여 말하였다.

"늙은 오랑캐가 도를 위해 말없이 산에 있지 않고 좋은 옷을 입고 요를 겹쳐서 깔고 앉았으니, 어찌 낙도가 아니겠습니까?"

석도가 뒤에 왔다. 도징이 한참 동안 석도를 자세히 바라보자 석도가 두려워하면서 그 까닭을 물었다. 도징은 말하였다.

"괴상합니다. 당신 피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바라보았을 뿐입니다."

8월에 도징은 제자 10여 인을 시켜 별실에서 재를 지내게 하고 도징은 잠깐 동합(東閤)으로 들어갔다. 석호는 그 부인 두(杜)씨와 함께 도징에게 문안했다. 도징은 말하였다.

"겨드랑이 밑에 도적이 있습니다. 10일 이내에 이 절 동쪽과 이 궁전 동쪽에서 피를 흘리는 일이 있을 것이니, 부디 동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두씨는 말하였다.

"화상은 망령이 드셨습니다. 도적이 어디 있습니까?"

도징은 곧 말을 바꾸었다.

"6정(情)이 받아들이는 것은 다 도적입니다. 늙었으니 망령도 당연하지요. 다만 젊은 사람을 혼미하게 하지 마십시오."

도징은 은연중에 말하고 끝내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2일 뒤에 과연 석선은 사람을 보내 절에서 석도를 죽이고, 석호가 문상 올 틈을 타서 큰 반역을 일으키려 했으나 석호는 먼저 도징의 경계를 받았기 때문에 그 화를 면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석선이 감옥에 갇혔을 때 도징은 석호에게 간하였다.

"석선은 폐하의 아들인데 중한 죄는 주지 마십시오. 만일 폐하께서 그를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시면 폐하는 아직 60여 년을 더 사실 것이나 만일 석선을 기어이 죽이시면 석선은 장차 혜성(彗星)이 되어 내려와 업(?)의 궁전을 쓸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석호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쇠사슬로 석선의 턱을 꿰어 끌어올린 뒤에 나무를 쌓고 불을 놓아 태워 죽이고, 그 궁속(宮屬) 2백여 인을 붙잡아 모두 수레로 사지를 찢어 장하(?河)에 던져 죽였다. 도징은 제자들에게 분부하여 별실의 재를 파하게 했다.

그 뒤 한 달이 지나 어느 날 요사스런 준마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그 꼬리는 불에 탄 형상으로 중양문(中陽門)으로 들어와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가서 머리를 동궁(東宮)으로 두었으므로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동북쪽으로 향해 달아나더니 조금 뒤에는 보이지 않았다. 도징은 이 소문을 듣고 한탄했다.

"재앙이 벌써 닥쳤구나."

그 해 11월에 석호는 태무전(太武殿) 앞에 신하들을 모으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도징은 나직이 말하였다.

"궁전마다 가시가 숲을 이루어 장차 사람의 옷을 다 찢겠구나."

석호가 사람을 시켜 궁전 돌 밑을 뒤져보았더니 가시가 나 있었다.

도징은 절에 돌아와 불상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말하였다.

"장엄을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그는 혼잣말로 '3년을 유지할까?' 하다가 스스로 '못 한다'고 답하였다. 또 '그러면 2년, 1년, 백 일, 한 달……' 하다가 스스로 '안 된다' 하고는 이내 말이 없었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와 그 제자 법조(法祚)에게 말하였다.

"무신년(戊申年)에 화가 싹트기 시작해 기유년(己酉年)에는 석(石)씨가 망할 것이다. 나는 그 난리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석호에게 보내어 하직하는 글을 주었다.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변천하는 것이요, 사람의 신명은 보전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도(貧道)의 재환(災幻)의 몸은 변화할 때가 이미 닥쳤습니다. 특별한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미리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석호는 이 글을 보고 창연(?然)히 말하였다.

"화상께 병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는데 왜 갑자기 떠나신다 하는가?"

석호는 궁중을 나와 절에 가서 도징을 위안하고 타일렀다. 도징은 석호에게 말하였다.

"생(生)으로 나오고 죽음으로 들어가는 것은 도의 떳떳함이요, 수명의 길고 짧음은 분수에 정한 것이니, 마음대로 늘릴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도는 행의 완전함을 중히 여기고 덕은 게으르지 않음을 귀하다 하는 것이니, 진실로 그 업조(業操)에 결함이 없으면 죽었다 하더라도 살아 있음과 같습니다. 도리를 어기면서 수명을 늘리려는 것은 원할 바가 아닌 것입니다.

지금에 다 말하지 못한 뜻은 국가를 위하는 마음을 부처의 이치에 두고 인색함이 없이 법을 받들며, 절을 많이 일으켜 그것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나타내는 것을 덕이라 일컫습니다. 부디 아름다운 복을 누리십시오.

그러하온데 펴는 정치가 사납고 극렬하며 법도 없는 형벌이 가혹하고 참담하여, 드러나게는 성인의 경전을 어기고 그윽하게는 법의 훈계를 위배하면서 스스로 징계하고 고치지 않으면 마침내 아무 복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마음을 낮추고 생각을 고쳐 아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면 나라의 복이 늘어나고 도인과 속인들이 기뻐하고 신뢰하여 목숨을 마치고 돌아가더라도 남은 한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석호는 비통하게 오열하면서 반드시 떠날 것을 알고 곧 도징을 위해 뫼구덩이를 파고 무덤을 만들었다. 도징은 12월 8일에 업궁사(?宮寺)에서 죽었으니, 때는 진(晋)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4년(348)이었다. 관리와 서민들이 모두 슬피 울고 온 나라가 다 문상하였으니, 나이는 117세였다. 곧 임장(臨?) 서쪽 자백(紫白)에 묻었으니, 그것은 석호가 만든 무덤이었다.

조금 있다가 양독(梁犢)이 난리를 일으키고 이듬해에 석호가 죽었다. 염민(染閔)이 왕위를 빼앗을 때 석(石)씨의 종족을 모두 죽였다. 염민의 자(字)는 극노(棘奴)이니, 도징이 전에 말한 '가시가 숲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도징의 왼쪽 유방 곁에 구멍 하나가 있었으니, 둘레는 4, 5치로서 배 속과 통했으므로 때로는 창자를 내고 혹은 솜으로 구멍을 막았다. 밤에 책을 읽으려 할 때는 으레 솜을 빼면 온 방안이 환했다. 또 재일(齋日)이 오면 으레 물가에 나가 창자를 들어내 물에 씻은 뒤에 다시 배 속에 넣었다.

도징의 키는 8자요, 풍채는 고아하며 경전의 깊은 뜻을 잘 해석하였고, 세상 일도 겸해 통달했다. 강설할 때에는 큰 뜻을 바로 가리켜 처음과 끝의 글과 말도 다 환히 알게 하며, 다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고통에서 구해 주었다. 두 사람의 석(石)씨가 흉악하고 횡포를 부릴 때 도징이 아니었다면 누가 감히 그들의 비법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백성들은 그 은혜를 날로 입으면서도 그것을 몰랐을 뿐이었다.

불조(佛調)와 보리(菩提) 등 수십 명의 훌륭한 스님들은 다 천축의 강거(康居)로부터 수만 리의 길을 멀다 않고 그 발로 사막을 걸어 도징에게 와서 교훈을 받았었다. 또 번하(樊河)의 석도안(釋道安)과 중산(中山)의 축법아(竺法雅)도 다 관하(關河)를 넘어와서 도징의 강설을 들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 정묘한 이치를 통달하고 깊은 뜻을 연구했다. 도징은 늘 말했다.

"나는 고향에서 업(?)까지 9만 리를 걸었고 집을 버리고 도에 들어간 지 109년이다. 술은 입에 댄 적이 없고 오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며, 계에 어긋나는 것은 행한 일이 없고 욕심이 없어 구하는 것이 없다."

그를 따라 수업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는데, 전후 모두 합하면 수만 명이었다. 지나는 주군(州郡)마다 절을 세워 모두 893개소이니, 이처럼 성대한 포교는 아무도 따르지 못했다.

처음에 석호가 도징을 관에 넣을 때 생시에 쓰던 지팡이와 발우를 함께 넣었는데, 뒤에 염민(染閔)이 왕위를 빼앗고 그 관을 열었을 때에는 오직 발우와 지팡이만 있었고, 도징의 시체는 없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도징이 죽은 달에 어떤 사람이 유사(流沙)에서 도징을 보았다고 하더라" 했다. 또 뒤에 모용준(慕容俊)은 도업(都?)이 석호 궁중에 있을 때 늘 꿈에 호랑이가 그 팔을 무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석호의 동티라 생각했다. 곧 사람을 시켜 석호의 시체를 동명관(東明?)에서 파내었는데, 그 시체는 아직 썩지 않았었다. 용준은 그 시체를 밟고 꾸짖었다.

"죽은 오량캐가 감히 산 천자(天子)를 위협하느냐? 너는 궁전을 낙성했을 때 네 아이의 반역을 당했거늘 어찌 남을 해치려느냐?"

용준은 매를 때려 모욕하고 장하(?河)에 던져 버렸다. 시체가 다리 기둥을 의지해 떠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진장왕(秦將王) 맹(猛)이 이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이것은 마유(麻)의 참언(讖言)이다. 마유란 자는 바로 위현(魏縣)의 유민(流民)으로서 그 종족은 알 수 없다. 그는 항상 베로 만든속옷에 베바지를 입고 시장에서 구걸했는데, 미친 사람 같았지만 현인(賢人)이었다. 혹자는 그가 도징과 아주 친밀한 사이라 했다. 그는 처음 석호를 만나 이야기할 때 다른 말은 없었고, 오직 "폐하께서는 장차 일주전(一柱殿) 밑에서 돌아가실 것입니다"고만 했다. 뒤에 부견(符堅)이 업(?)을 정벌할 때 모용준의 아들 위(暐)는 부견의 대장 곽신호(郭神虎)에게 붙들렸으니, 실로 전에 호랑이를 꿈꾸던 증험이었다. 전융조(田融趙)의 기록에는 "도징은 죽기 수년 전에 손수 무덤 구덩이를 파고 무덤을 만들 때 이미 그 무덤이 반드시 파일 것을 알았으며, 또 시체가 거기 없었다"고 하였지만 무엇 때문에 미리 두려워했겠는가? 이것은 융조의 잘못된 말이다.

불도징을 혹은 불도등(佛圖燈)이라 하고, 혹은 불도등(佛圖橙)이라고도 하는데, 다 범음(梵音)을 취해 같지 않을 뿐이다.

진(晋)의 축법인(竺法印)

진(晋)나라 사문(沙門) 축법인(竺法印)은 진나라 태원(太元) 때에 추류(?流)로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안북장군(安北將軍) 태원왕(太原王) 문도(文度)와는 매우 친한 벗이었다. 일찍이 그와 함께 생사의 보응을 이야기했으나 아득하여 밝히기 어려워 그 도리를 어느 정도 이해는 했으나 분명히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 맹약하였다.

"죽은 뒤에 앎이 있어 과연 죄와 복의 보응을 보거든 서로 알려 주자."

법인은 그 뒤에 회계(會稽)에 살다가 다음 해에 죽었으나 왕은 서울에 있으면서 그런 줄을 모르고 있었다. 왕의 꿈에 법인이 나타나 서로 반기고 기뻐하며 문안했다. 법인은 말하였다.

"빈도(貧道)는 어느 때 병으로 죽었습니다. 죄와 복은 헛되지 않아 그 응보는 마치 그림자와 메아리 같은 것입니다. 단월(檀越)님은 부디 부지런히 도덕을 닦아 그 신명(神明)을 구제하십시오. 전에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와서 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이내 사라졌다. 왕은 그 뒤로는 부지런히 불법을 믿고 받들었다.

송(宋)의 석보의(釋寶意)

송(宋)나라 경사(京師) 중흥사(中興寺)의 사문 보의(寶意)는 범어로는 아나마저(阿那摩低)이며, 성은 강(康)씨이다. 강거(康居) 사람으로서 대대로 천축(天竺)에 살았다. 송나라 효건(孝建) 때에 경사에 와 있으면서 경론(經論)을 잘 알았으므로 삼장(三藏)이라고 불렸다. 항상 수백 개의 조개를 굴려 곧 길흉을 알고 신주(神呪)에 능하여 손바닥에 향을 바르고는 과거의 일도 잘 알았다.

송나라 세조(世祖)가 그에게 구리로 된 타구(唾具)를 보시하였다. 높이는 2자 남짓했다. 보의는 항상 그것을 평상 앞에 두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그것을 훔쳐 갔다. 보의는 자리를 말아 거기에 대고 주문을 수십 번 외우면서 3일을 지냈다. 그러자 타구는 돌아와 그 자리 속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까닭을 몰랐다. 이에 4방의 도속(道俗)들은 다 그의 신이(神異)함에 감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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