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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31~40권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11-08-13 (토) 12:19 조회 : 2187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31~40권.hwp (584.4K), Down : 53, 2011-08-13 12:19:40

법원주림(法苑珠林) 100권 중 제 31~40권

법원주림 제 31 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23. 잠둔편(潛遁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들으니 성현은 세상에 호응해 줌에 있어서, 그 자취는 방향이 없으나 그가 머무르는 나라는 이익을 얻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한다. 속된 선비는 그 길흉(吉凶)에 막히지만 훌륭한 지혜를 가진 이는 그 선악에 편안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기다리면 그 도량은 하늘과 같아질 것이다.

옛날 진(晋)나라 무제(武帝)의 세상에는 천축(天竺)에 기역(耆域)이 있었고, 송(宋)나라 무제 초년에는 팽성(彭城)에 배도(杯度)가 있었는데, 그들은 다 상서로운 징조를 보여 백성들을 깨우친 이들이다. 제량(齊梁)의 사문 보지(保誌)는 영명(永明) 초년에 처음 나타났다. 지혜를 숨기고 미치광이처럼 거친 속세에 어울려 살면서, 과거의 일을 간직하고 미래의 일을 아니, 언제나 그 영험이 맞았다. 얼굴을 움직이고 말을 내면 실수가 별로 없었으므로 사서(士庶)들은 메아리처럼 달려가,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구름 같았다. 그래서 자취는 세속에 매어 있었으나 정신만은 명적(冥寂)에 노닐었다. 물과 불도 태우거나 적시지 못하고 뱀과 호랑이도 침노하거나 독을 주지 못하였다. 비록 9관(關)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몸은 마침내 걸림이 없었다.

부처님의 이치를 이야기하면 성문(聲聞) 이상이요 숨어 삶을 말하면 둔선(遁仙)이나 고사(高士)였다. 세상에 선(善)이 있기 때문에 선을 내어 그것에 호응하고, 세상에 악이 있기 때문에 악을 내어 그것에 호응하였으니, 이른바 높이 달려 있는 해와 달 같고 깊이 묻혀 있는 금과 돌 같은 존재라 할 만하다. 그 무궁한 복을 여기서 볼 수 있다.

(2) 인증부(引證部)

『생경(生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무수한 겁 이전에 누이와 동생 두 사람이 있었다. 누이에게는 아들 하나가 있었다. 그 아들은 외삼촌과 함께 베를 짜서 나라에 납품했다. 그들은 궁중 창고 안에 있는 기이하고 좋은 보물을 보고 서로 의논했다. (우리는 이렇게 부지런히 힘들게 베를 짜지만 창고에는 물건이 얼마나 되는가. 차라리 우리 둘이 저 보물을 훔쳐 이 가난을 면해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다 잠들기를 기다려 땅을 파서 굴을 만들고 가만히 들어가 훔치니, 훔친 물건이 셀 수 없었다. 이튿날 창고지기가 물건이 많이 줄어든 것을 발견하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조서를 내렸다. (이 사실을 퍼뜨려 사람들이 알거나 듣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외삼촌[舅]과 생질[甥]은 왕이 모른다고 생각했다. 왕이 창고지기에게 말하였다. (이 뒷날 그들이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이니, 우선 엄격하게 지키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오거든 붙잡아 놓치지 않게 하라.)

창고지기는 이 명령을 받고 더욱 엄하게 지켰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들은 다시 훔치러 왔다. 생질이 외삼촌에게 말하였다. (외삼촌은 지금 나이도 많고 체력도 약하므로 만일 창고지기에 붙잡히면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힘이 세므로 마땅히 외삼촌을 구출할 수 있습니다.) 외삼촌은 마침 굴로 들어갔다가 그만 창고지기에게 붙들렸다. 그를 붙든 자는 큰 소리로 여러 사람을 불렀다. 생질은 붙들린 외삼촌을 구출하지 않으면 밝은 날에 사람들이 보고 알 것을 두려워해 곧 외삼촌의 머리를 끊어 가지고 굴을 빠져 나와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에 창고지기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그 시체를 끌어내어 네거리에 두어라. 누구나 와서 곡(哭)하고 그 시체를 가져가는 자가 있으면 그 놈이 바로 그 도적이다.) 그리하여 시체를 네거리에 버려 두고 여러 날 동안 지켰다. 사람과 말이 길을 메울 정도로 오가는데, 이 도적은 시끄러움을 틈타 두 수레의 섶나무 위에 그 시체를 올려놓았다.

창고지기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왕이 조칙을 내렸다. (가만히 엿보다가 누가 와서 그것을 태우는 사람이 있거든 곧 잡아 묶어 가지고 오라.) 이에 생질은 아이들을 시켜 횃불을 잡고 춤을 추게 하고, 사람들이 모두 그리로 모여 떠들어댈 때, 가만히 불을 섶나무에 던져 불꽃이 치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자들은 누가 그렇게 했는지 모르고,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만일 화장이 다 되었거든, 더욱 엄하게 지키다가 누가 와서 뼈를 챙기는 자가 있으면 그가 바로 그 괴수일 것이다.) 생질은 그것을 알고는 술을 아주 독하게 빚어, 그것을 가지고 지키는 자들에게 가서 가만히 팔았다. 지키는 자들은 며칠 술을 굶은 참이라 술을 보자 마구 마셔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술에 취해 모두 잠에 떨어졌다. 그 때 생질은 그 술병에 뼈를 넣어 가지고 갔으나, 지키는 자들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이튿날 다시 왕에게 알리자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지금까지 경비하고 지켰으나 끝내 잡지 못했으니, 그 도적은 아주 교활하고 영리한 놈이다. 다시 계획을 세우리라.) 그리하여 왕은 곧 그 딸을 불러내어, 온갖 보배로 장식하고 화장시키고는 큰 물가에 있는 별당에 두고 말하였다. (너희들은 엄하게 살피고 함부로 하지 말라. 반드시 색(色)을 탐해 저 여자들에게 가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를 붙잡거든 큰 소리로 외쳐 모두 가서 잡게 하라.)

다른 날 밤에 이 생질은 가만히 와서 그 물을 이용해 나무 등걸을 물을 따라 흘려보내고는 큰 소리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가만히 숨어 지키던 자는 놀라서 그리고 갔다가, 다른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람은 없고 다만 나무 등걸만을 보았다. 이렇게 며칠 동안을 변함없이 계속했다. 지키는 자가 조는 틈을 타서 생질은 곧 등걸을 타고 가만히 그 여자 방으로 갔다. 여자는 곧 그의 옷을 잡았다. 생질이 여자에게 말하기를 (내 옷을 끌어당겨 무엇하겠느냐. 내 팔을 잡아라)라고 하였다. 생질은 본래 음흉하면서 영리하여, 미리 가지고 갔던 죽은 사람의 팔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곧 옷을 놓고 그 팔을 붙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이 잠을 늦게 깨는 틈을 타서 생질은 곧 도망쳐 왔다. 이튿날 다시 왕에게 알리자 왕은 말했다. (이 사람의 수단은 변화무쌍하다. 아무리 해도 잡을 수 없으니 장차 어쩌면 좋겠느냐.)

그녀는 곧 임신하여 열 달 만에 아들을 낳았다. 아이는 자랄수록 단정했다. 그리하여 왕은 유모를 시켜 아이를 안고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누구든 이 아이를 보고 한숨을 쉬는 자가 있거든 곧 잡아 묶어 보내라고 했다. 유모는 아이를 안고 종일 돌아다녔으나 아무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질은 떡장수로 가장하여 떡솥 곁에 앉아 있었다. 아이가 배고파 울므로 유모는 아이를 안고 솥 곁으로 가서 떡을 사서 아이에게 먹였다. 생질은 아이를 보고 한숨지었다. 유모는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고 왕은 또 명령했다. (왜 잡아 보내지 않았느냐?)

유모가 대답하였다. (아이가 배가 고파 울고 떡장수는 떡을 주고 한숨지었으나, 그가 도적인 줄 몰랐는데 어떻게 아뢰겠습니까?)

왕은 또 유모를 시켜 아이를 안고 나가, 누구든 아이를 보고 가까이 오는 자가 있거든 곧 잡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생질은 맛 좋은 술을 팔면서 그 유모와 아이를 지키는 사람들을 불러 술을 권해 취해서 잠들게 하고는 그 틈을 타서 아이를 훔쳐 달아났다. 그들은 술에서 깨어나 아이를 잃은 것을 알고 곧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자, 왕은 또 조칙을 내렸다. (너희들은 미련하고 어리석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술을 탐해 마시다가 도적도 잡지 못하고 아이마저 잃었구나.)

그리하여 생질은 아이를 안고 다른 나라로 가서 그 국왕을 뵙고 점을 쳤다. 그리고 불경을 인용해 그 뜻을 설명했다. 그 왕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녹(祿)과 벼슬을 주고 대신으로 삼고는 말했다. (그대의 지혜와 방편은 우리 나라에서는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 그대를 내 딸과 짝을 지어 주고 싶다. 그대 마음대로 하게.)

생질은 대답했다.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대왕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면 실은 우리 나라 국왕의 딸을 말해 보려 했습니다.)

왕은 말하였다. (좋다. 그대 말을 따르겠다.)

그리고는 왕은 곧 자기 아들로 삼고 사신을 보내 저 왕의 딸을 청했다. 왕(본국의 왕)은 곧 승낙했다. 그래서 이 왕은 곧 사신을 보내어 저 왕의 딸을 맞이하려고 조칙을 내리고 그 태자를 시켜 5백 마리의 말을 다 장엄했다. 생질은 적의 신하가 되었으므로 몹시 두려워하며 (만일 저 나라에 가면 저 나라의 왕은 반드시 나를 알아보고 잡을 것이 틀림없다)고 하고는 곧 그 왕에게 아뢰었다. '만일 대왕께서 나를 보내시려면 마땅히 사람과 말과 의복과 안장·굴레 등을 한결같이 차이가 없게 해서 구별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며느리를 맞이하십시오.'

왕은 그 말이 옳다 하고 곧 250기(騎)는 앞에 있게 하고, 250기는 뒤에 있게 한 다음, 사위는 그 가운데서 말을 탄 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저 딸의 아버지(왕)는 몸소 앞에 나와 여러 번 자세히 살펴보고는, 그 말 탄 사람들 속에 들어가 직접 생질을 붙들고 나와 말하였다. (네가 바로 그 놈이지. 백방으로 방편을 다 썼지만 어찌 그리 붙들기 어려우냐?)

생질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예,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대의 총명은 천하에 짝할 이가 없다. 그대가 원한다면 내 딸을 주어 부부가 되게 하리라.)'

부처님께서 이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생질이 누군지 알고 싶으냐? 그는 바로 나요, 그 외국의 왕은 바로 사리불이다. 그 외삼촌은 지금의 저 조달이요, 그 신부의 아버지는 바로 수두단왕(輸頭檀王)이며, 그 신부의 어머니는 바로 마야(摩耶) 부인이요, 그 신부는 바로 구이(拘夷)이며, 그 아들은 바로 라운(羅雲)이니라.'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모두 기뻐하였다."

또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깊이 생각하여 공(空)과 무상(無常)의 모습[相]을 관찰하기 때문에, 비록 미묘하고 좋은 5욕(欲)이 있다 하더라도 온갖 번뇌를 내지 않는다. 비유하면, 어떤 국왕의 한 대신이 자기의 죄를 숨겨 아무도 아는 이가 없는 것과 같다. 왕이 그에게 말하였다. '살찌면서도 기름기가 없는 양을 데리고 오너라. 만일 네가 그 양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너에게 죄를 주리라.'

그 대신은 지혜가 있어서, 큰 양 한 마리를 매어 두고 풀과 곡식만을 먹여 잘 기르면서도 하루 세 번씩 이리를 시켜 겁을 주었다. 양은 비록 살은 쪘으나 지방은 없었다. 그래서 양을 몰고 가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사람을 보내 양을 죽여 보았으나 살은 쪘지만 지방은 하나도 없었다. 왕이 대신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렇게 되었는가?'

대신은 이상의 사실을 이야기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무상(無常)·고(苦)·공(空)의 이리를 보고는 온갖 번뇌의 지방은 녹고 공덕의 살은 찌게 하느니라."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마갈타국(摩竭陀國)의 어떤 장자가 사내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그 얼굴모습이 구족(具足)하고 매우 사랑스럽고 공경스러웠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에 그 집 창고에서 금코끼리 한 마리가 저절로 나왔다. 부모는 기뻐하면서 그 상서로 인해 이름을 상호(象護)라고 했다. 아이가 차츰 자라나자 코끼리도 자랐고, 아이가 걸을 수 있게 되자 코끼리도 걸어다녔으며, 드나들거나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항상 서로 떨어지지 않았으나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안에 있었다. 코끼리의 대소변에는 오직 좋은 금만 나왔다. 이 인연으로 그 집 창고에는 보배가 가득했었다. 상호는 장대하여 항상 그 코끼리를 타고 동서로 돌아다녔는데 느리고 빠름이 뜻을 따랐으므로 사람의 마음에 꼭 들었다.

아사세왕(阿?世王)은 이 소문을 듣고 그것을 보고자 했다. 상호 부자는 그 코끼리를 타고 왕궁 문 앞에 있었다. 왕은 코끼리를 탄 그대로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코끼리에서 내려 들어가 왕에게 예배했다. 왕은 매우 기뻐하여 그들에게 앉으라 명하고 음식을 내린 뒤에 간단히 이야기했다. 조금 있다가 그는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가려고 했다. 왕이 상호에게 말하였다. '그 코끼리는 여기 두고 데려가지 말라.'

상호는 슬퍼하며 분부를 받들어 코끼리를 그대로 두고 빈 걸음으로 궁문을 나왔다. 오래지 않아 코끼리는 그 자리에서 땅 속으로 들어갔는데 다시 솟아나 문 밖에 있었다. 상호는 다시 그것을 타고 왕의 해침을 염려하여, 바로 출가하고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그리고 항상 비구들과 함께 숲 속에서 참선하였는데 그 금빛 코끼리는 항상 그의 눈앞에 있었다.

사위국 사람들은 금코끼리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다투어 이것을 보러 모여왔으므로, 못내 시끄럽고 조용하지 않아 수도하기에 방해가 되었다. 그 때 비구들은 이 사정을 부처님께 아뢰자 부처님께서 상호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문에 시끄러우니 그것을 돌려보내도록 하라.' 그러나 코끼리는 떠나려 하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상호야, 너는 (나와의 금생(今生)의 인연이 다 되어 이제는 네가 다시 필요 없다)고 말하여라. 이렇게 두세 번 타이르면 코끼리는 반드시 사라질 것이다.' 그 때 상호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들어 그대로 말하였다. 이 때 그 금코끼리는 곧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처님께서 이어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과보가 있었는가? 과거 가섭불 때 사람의 수명은 2만 년이었다.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탑을 세웠는데 거기 보살이 있었다. 그는 본래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 코끼리 태 안에 들어갔다. 그 때 그 코끼리 몸에 조그만 상처가 있었는데, 그 때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치료해 주고는 서원을 세웠다. (나로 하여금 장래에 늘 귀한 집에 태어나서 재물의 쓰임새에 모자람이 없게 하여지이다.)

그는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났고, 그 천상의 목숨이 다해 세간에 내려와 태어났다. 그리하여 항상 존귀한 집에 있을 때는 금코끼리가 늘 따라다니며 호위하였다. 그 때에 그 코끼리를 치료해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저 상호이니, 그 코끼리를 치료해 주었기 때문에 저절로 부자가 되었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삼보(三寶)를 받들었기 때문에 지금 나를 만나 도를 얻었느니라.' "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난타왕(難陀王)은 총명하고 두루 통하여 능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아는 것으로써 '나를 당할 것 없다'고 하였으나 대꾸하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다. 그 때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나가사나(那伽斯那)라는 비구가 있습니다. 그는 총명하여 뛰어난데 지금 산중에 있습니다. 대왕께서 시험해 보시렵니까?'

왕은 곧 사람을 시켜 소유(蘇油)를 한 병에 가득히 채워 그것을 그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왕은 생각하였다. '내 지혜는 가득 찼다. 누가 나보다 낫겠는가.'

사나는 그 소유를 받자 곧 왕의 뜻을 알아차리고, 제자들에게서 바늘 5백 개를 거두어 그것으로 소유 속을 찔렀으나 소유는 넘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사나가 곧 그것을 왕에게 돌려보냈다. 왕은 그것을 받고 나서 그 뜻을 알고 조금 있다가 사자를 보내어 사나를 청했다. 사나는 곧 달려갔다. 왕은 그를 궁중에 맞아들이고 그에게 거친 밥을 주었다. 그는 서너 숟가락 먹고는 곧 만족하다고 했다. 왕은 다음에 부드럽고 맛난 밥을 주었다. 그는 곧 마구 먹었다. 왕이 다시 물었다. '아까 만족하다 했는데 왜 지금 또 여전히 먹는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제가 아까는 거친 밥에 만족한 것이지, 부드러운 밥에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이어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이시여, 지금 전상(殿上)에 사람들을 다 모아 가득 차게 하십시오.'

왕은 곧 사람들을 불러 전상에 가득히 채우니, 더 이상 설 곳이 없었다. 왕이 뒤에서 와서 전상으로 올라가려 하자, 모든 사람들은 두려웠기 때문에 모두 한 편으로 비켜서 그 사이가 넓어져 많은 사람들이 설 수 있었다. 그 때 사나가 곧 왕에게 말했다. '거친 밥은 백성과 같고 부드러운 밥은 왕과 같습니다. 백성이 왕을 보았는데 누가 길을 피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다시 물었다. '출가자와 재가자 중에 누가 도를 얻겠는가?'

사나가 답하였다. '둘 다 도를 얻을 것입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둘 다 도를 얻는다면 무엇 때문에 출가하는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비유하면 여기서 3천여 리의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즉 젊고 건강한 사람을 보내어 양식을 가지고 말을 타고 또 무기를 지니고 가면 빨리 그곳까지 도착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답하였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사나가 다시 물었다. '만일 노인을 보내어 약한 말을 타고 또 양식도 없이 간다면 그곳까지 갈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비록 양식을 가지고 가더라도 그곳까지 가지 못할까 두렵거늘 하물며 양식 없이 가는 것이겠는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출가하여 도를 얻는 것은 비유하면 젊은이와 같고, 재가(在家)하여 도를 얻는 것은 마치 노인과 같습니다.'

왕이 다시 물었다. '해가 하늘에 있을 때 그 실체는 하나인데, 무엇 때문에 여름에는 지독히 덥고 겨울에는 지독히 추운가? 또 여름에는 해가 길고 겨울에는 해가 짧은가?'

사나가 대답하였다. '저 수미산 아래 위에 길이 있습니다. 해가 여름에는 위의 길을 다니는데 길은 멀고 걸음은 더디면서 금산(金山)을 비추기 때문에 해가 길고 덥습니다. 또 해가 겨울에는 아래 길로 다니는데, 길은 가깝고 걸음은 빠르면서 큰 바닷물을 비추기 때문에 해가 짧고 추운 것입니다.'

게송을 읊는다.

잠둔(潛遁)의 교묘한 변화는

잘 희롱하고 몰래 달리는 데 있다.

위대하여라, 인자함과 지혜여

관리가 붙잡아도 잘 빠져 나가는구나.

양은 살찌나 지방이 없고

상호는 하늘이 따라다니며 호위하나니

복에 응함을 느끼어 얻음이라

비밀한 가피가 근기에 부합했다.

고요하면 깊고 또 잠잠하며

움직이면 신비롭게 빛난다.

끊임없이 의거하나니

아름답게 언제나 문채가 빛난다.

그 종(宗)이 원상(元象)을 돌이키매

빛이 잠기고 그림자가 떠나나니

숨고 나타남을 헤아리기 어렵고

그 진실과 거짓을 알기 어렵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열세 가지 증험을 인용하였다.]

서진(西晋)의 사문 유살하(劉薩何)

서진의 사문 배도(杯度)

서진의 사문 축불도징(竺佛圖澄)

서진의 사문 석도진(釋道進)

송(宋)나라 사문 석담시(釋曇始)

송나라 사문 석법랑(釋法朗)

송나라 사문 석소석(釋邵碩)

송나라 사문 석혜안(釋慧安)

제(齊)나라 임금 고양(高洋)

제나라 사문 석승혜(釋僧慧)

양(梁)나라 사문 석보지(釋保誌)

오(吳)나라 거사(居士) 서광(徐光)

수신잡전(搜神雜傳) 지선(地仙) 등의 기록

① 서진(西晋)의 사문 유살하(劉薩何)

서진(西晋) 자주(慈州) 성곽 밑에 있는 안인사(安仁寺)의 서쪽에 유살하(劉薩何) 스님의 사당이 있다.

옛날 서진 말엽에 이 고을의 본래 이름은 문성군(文成郡)이었으니 즉 진문공(晋文公)이 피난했던 곳이다. 자주의 동남에서 멀지 않은 높고 편편한 언덕 위에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살하(薩何)이고, 성은 유(劉)씨이다. 그의 사당은 웅장하고 화려하여 온갖 장식을 다 갖추고 있다. 살하는 처음에 속가에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과 다름이 없었으나, 항상 무엇을 살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불법을 전혀 받들지 않았었다. 살하가 병환으로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 말하였다. "저승에서 관세음을 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네 죄는 중하다. 마땅히 고통을 받아야 하리라. 그러나 너의 무지함을 가엾이 여겨 우선 살려 놓아 보낸다. 낙하(洛下)의 제성(齊城)·단양(丹陽)·회계(會稽) 등에는 모두 아육왕(阿育王)의 탑이 있으니, 거기 가서 예배하면 과거에 지은 죄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살하가 다시 살아나게 된 뒤로는 과거의 습관을 고쳤으나 그 지방에는 부처님이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 성곽 아래에 어떤 사람에게 성곽 아래에 형편을 자세히 물었다. 그는 방편으로 깨우치고 인자한 가르침을 설명했다. 계호(稽胡) 사람은 정직한지라 그의 말을 신임했다. 그래서 해마다 4월 8일이면 평원(平原)에서 크게 모여, 각각 술과 떡 및 깨끗한 공양으로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술을 마시며 즐기고, 곧 깨끗한 공양을 행하다가 한낮이 되면 마치곤 했다. 점심 때가 지난 뒤에는 부처님을 찬탄하고 삼보(三寶)를 노래하면서 새벽까지 계속했다.

살하는 드디어 출가하여 법명(法名)을 혜달(慧達)이라고 했다. 백성들은 우러러 공경하여 부처님처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기적을 나타내므로 그에 대한 믿음은 더욱 드높았다. 그는 낮에는 높은 탑에 올라가 대중을 위해 설법하고 밤이면 누에고치 속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아침이 되면 누에고치 사이에서 나오는데 집에서 조금도 편히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소하성(蘇何聖)'이라고 하였으니 소하란 계호 지방에서 누에고치라는 뜻이다. 고치 속에서 자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저 풍속에는 마을마다 불당(佛堂)에 모두 그의 상(像)을 세우고 그것을 호사불(胡師佛)이라고 부른다.

지금 안인사(安仁寺) 사당의 입상(立像)은 매우 장엄하여 지방 사람들이 소원을 비는데 향과 꽃이 매우 많다. 해마다 정월에는 그 상을 가마에 싣고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가고 머무름이 자재한 것은 사람의 힘만이 아니어서 저 마을에 가고자 하면 두 사람이면 들고 갈 수 있었다. 액문(額文)이 열리면 그 안색이 화열(和悅)하고 그 마을에는 1년 동안 죽거나 병 드는 사람이 적으며, 가고자 하지 않으면 열 사람이 들어도 옮길 수 없고 액문이 닫히면 슬퍼하는 안색이고 참담해지며 마을에는 반드시 재앙이 따랐다. 그러므로 그 지방 사람은 지금도 항상 그것으로 징후를 삼는다고 한다. 그리고 또 그것도 관세음이 얼굴을 빌어 세상을 교화하기 위해 이름을 혜달이라 했다고 한다.

경전 한 권이 그 지방에 유행하는데, 그것은 순전히 호어(胡語:범어)로 되어 있으나 그는 그것을 읽고 스스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황하(黃河) 좌우에 있는 자(磁)·습(?), 남(嵐)·석(石), 단(丹)·연(延), 수(綏)·은(銀) 등 8주(州)에서 모두 공경하여 받들며 무슨 행사가 있을 적에는 저기서 말한 것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언덕에 다 흙탑을 세우고 그 위에 백찰(柏刹)을 세워 거기에 누에고치를 달아 놓았으니 그것은 혜달이 살던 곳이라는 표시를 한 것이다.

그런데 살하가 고향[本鄕]에서 불법을 펴고는 동쪽으로 단양(丹陽)에 가서 여러 탑을 만들고 예식을 다 행했는데, 서쪽으로 양주(凉州)·번화(番禾)·어곡(御谷)·예산(禮山) 등으로 가서 상을 모셔 내어, 숙주(肅州) 주천(酒泉) 곽서(郭西)를 출행했다가 모래밭에서 죽었다. 그 해골은 잔잔하여 모양이 아욱씨 같고 가운데에 모두 구멍이 있어 노끈으로 꿸 수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그 지방에서 재앙이 있는 사람은 그 모래밭에 가서 그것을 찾는다. 그러나 그것을 얻더라도 흉망(凶亡)하게 되고 길상(吉祥)은 얻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찾다가 결국 얻지 못하였는데 그 왼쪽에 있는 관음상(觀音像) 위에서 그것을 얻었으나 밤이 되자 잃어버렸다. 이튿날 아침에 찾아 보았더니 그것은 도로 관음상 손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 사람은 이것을 매우 높이 받들었다.

② 서진의 사문 배도(杯度)

서진(西晋)의 사문 배도(杯度)는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기주(冀州)에서 나서 70년쯤 살았다. 그는 성명을 숨기고 열심히 수행하지 않았으므로 그 때는 사람들의 존중을 받지 못했었다.

일찍이 어느 집에서 잠을 자는데 그 집에 금상(金像)이 있었다. 배도는 새벽에 일어나 그것을 가지고 떠나 버렸다. 주인은 말을 채찍질해 쫓아갔으나 배도가 천천히 걸어갔는데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강에 이르자 그는 조그만 술잔을 타고 맹진(孟津)을 지나갔다. 그 때문에 그 뒤에 이름을 배도라 했다. 그 뒤에 팽성(彭城)에 살았는데 뒤에 사람들이 늘 그를 보면 그는 항상 길에 있었고 그 거처를 알 수 없었다. 항상 갈대 도시락을 가거나 오거나 간에 늘 짊어지고 다녔다. 혹은 눈이 어는 한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들어가 목욕하였는데, 살빛은 빛나고 조금도 추운 기색이 없었다.

의희(義熙) 때에 잠깐 광릉(廣陵)에 있었는데, 자사(刺史) 패국유번(沛國劉蕃)이 본래부터 그 명성을 들었기 때문에 사람을 보내어 그가 오기를 청하였다. 그는 여전히 도시락을 메고 있었으므로 사람을 시켜 들어보았으나 무거워서 들리지 않았다. 유번은 몸소 일어나 그를 바로 보았더니 다 해어진 누더기뿐이었다. 배도는 하직하고 떠날 때 손에 들고 있는 그 도시락은 마치 기러기의 털처럼 가벼웠다. 영가(永嘉) 초년에 세상을 떠났다.

라집(羅什)은 그가 팽성에 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그 사람과 장난치면서 이별한 지가 벌써 수백 년이 되었구나' 하였으니, 여기서 라집도 신인(神人)임을 알 수 있다.

③ 서진의 사문 축불도징(竺佛圖澄)

서진(西晋) 말년의 축불도징(竺佛圖澄)은 서역(西域) 사람이다. 형모(形貌)는 1백 살 먹은 사람과 같고 왼쪽 옆구리에는 구멍이 있는데 그 둘레는 4, 5촌이며 비단으로 그것을 막고 있다. 재일(齋日)에는 물가에 나가 위장(胃腸)을 끄집어내어 물에 씻어 구멍으로 넣고 밤이 되어 비단을 빼면 빛이 온 방을 비추어 글을 읽곤 했다. 비록 많은 책을 다 알지는 못했으나 여러 학자들과 변론할 때는 그 해석이 막힘이 없어서 굴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영가(永嘉) 때에는 낙하(下)에 있었다. 그 때 석륵(石勒)이 하북(河北)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사람들을 죽이며 위세를 부렸으므로, 그 해를 입은 도인과 속인들이 적지 않았다. 도징은 그 군문에 가서 길흉을 미리 점쳤으므로 석륵은 늘 그를 보고 예배했다. 도징이 그를 교화시켜 불법을 받들게 하여 죽임과 형벌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그 고을에서 해를 면한 사람이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석륵은 유요(劉曜)와 틈이 생겨 서로 버티고 있을 때 도징에게 그 방법을 물었다. 도징은 "그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그리고 손바닥에 참기름을 발라 그에게 보였는데, 유요는 붙잡혀 뒷짐을 지어 붉은 밧줄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과연 그를 잡았으니 마치 손바닥에 본 것과 같았다.

건평(建平) 4년(402) 4월 8일에 석륵은 절에 가서 부처님을 목욕시켰다. 실바람에 방울이 울렸다. 도징은 대중을 돌아보고 "저 방울 소리의 뜻을 아는가?" 하였더니, 방울이 말하기를 "금년 안에 이 나라에 큰 초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7월이 되어 과연 석륵이 죽고 석호(石虎)가 왕위에 올랐다. 석호는 석륵보다 스님을 더 받들어 가마를 주고 말을 탄 채 출입하게 하였다. 그의 상서로운 징험은 수없이 많이 나타났으나, 생략하고 다 기술하지 않는다.

석호 말년에 도징은 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이 나라에 장차 화가 있을 것이다. 그 때가 오기 전에 나는 세상을 하직할 것이다." 무신년(戊申年, 408)에 태자가 그 이모를 죽였다. 석호는 화를 내어 그 처자까지 죽였는데 이듬해에 석호는 죽었다. 드디어 염민(?閔)의 난리가 일어나 그를 업서(?西)에 장사 지냈다.

어떤 이가 말했다. "도징이 죽던 날, 상인들이 그가 유사(流沙)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석호가 그 관을 열어 보았더니 가사와 발우만이 있었다." 도징이 중원(中原)에 있을 때 큰 난리를 만났으나, 인자한 교화를 빛내어 그 덕이 가장 높았으니, 그 지극한 성인이 아니면 어찌 그런 도탄(塗炭)을 구할 수 있었겠는가. 무릇 980여 곳에 절을 짓고 도인과 속인을 두루 구제하여 천하를 둘로 갈라놓았었다.

④ 서진의 사문 석도진(釋道進)

서진(西晋) 업중(?中)에 살고 있던 불도징(佛圖澄)의 제자 도진(道進)은 그 학문이 내외(內外)를 다 통하여 석호(石虎)의 존경을 받았다. 일찍이 은사(隱士)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석호는 도진에게 말하였다. "양가(楊軻)라는 사람은 짐(朕)의 백성이다. 그런데 10여 년 동안 불러도 내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가 보았더니 거만스레 누워 있었다. 짐이 비록 덕이 없으나 모든 나라에 군림(君臨)한다. 내 수레가 가는 곳에는 하늘이 끓고 땅이 솟구친다. 비록 시키지 않더라도 나무와 돌이 다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어찌 하나의 필부(匹夫)로서 항상 거만하게 구는가. 옛날 태공(太公)은 제(齊)나라에 가서 먼저 화사(華士)를 죽였으니 태공 같은 현철(賢哲)이 어찌 잘못했겠는가."

도진은 말하였다. "옛날 순(舜)임금은 포의(蒲衣)를 우대했고, 우(禹)임금은 백성(伯成)에게 갔으며, 위(魏)나라는 간목(干木)에게 절하였고, 한(漢)나라는 주당(周黨)을 아름답게 여겼으며, 관녕(管寧)은 조씨(曹氏)에 응하지 않았고, 황보(皇甫)는 진세(晋世)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 2성(聖) 4군(君)은 다 그 절조를 아름답게 여기고 탐내어 장차 다툼을 격려(激?)함으로써 맑은 풍속을 높이었습니다. 원컨대 폐하(陛下)께서는 순임금과 우임금의 덕을 좇고 태공의 형벌 쓴 것을 본받지 마십시오. 임금의 거동은 반드시 책에 기록되는 것이니 어찌 조사(趙史)에 은둔(隱遁)의 전기(傳記)가 없도록 하겠습니까?" 석호는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곧 양가를 자기 집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10가(家)를 공급해 주었다.

도진은 다시 도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아뢰었다. 도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 말은 매우 훌륭하다. 다만 양가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뒤에 진주(秦州)에 병란(兵亂)이 일어났을 때 양가의 제자가 양가를 소에 태우고 서쪽으로 달아났다가, 군사들에게 사로잡혀 둘 다 모두 죽임을 당했다.

석호는 일찍이 낮잠을 자다가, 양떼들이 생선을 지고 동북쪽에서 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어 도징을 찾아가 물었다. 도징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하다. 선비(鮮卑)가 저 중원(中原)을 점유하리라."

그 뒤에 과연 모용(慕容)씨가 거기에 도읍했다.

⑤ 송(宋)나라 사문 석담시(釋曇始)

송(宋)나라 위위(僞魏)의 수도 장안(長安)에 석담시(釋曇始)가 있었으니 그는 관중(關中)사람이다. 그는 출가한 뒤로 이적(異迹)이 많이 있었다. 진(晋)나라 효무(孝武) 태원(太元) 말년에 경율(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에 가서 선화(宣化)하면서 3승(乘)을 가르치고 계율에 귀의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고구려가 도를 듣기 시작한 때이다.

의희(義熙) 초년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와 3보(輔)를 깨우쳐 인도했다. 담시는 그 발이 얼굴보다 희고 맨발로 진흙물을 건너도 발에 진흙이 묻지 않았으므로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백족(白足) 화상이라 일컬었다.

그 때 장안 사람 왕호(王胡)는 그 숙부가 죽은 지 여러 해 만에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왕호를 데리고 지옥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온갖 과보(果報)를 다 보여주었다. 왕호가 돌아오려고 하직 인사를 하자 그는 왕호에게 말하였다. "이미 과보를 다 알았으니 다만 백족 아련(阿練)만을 받들어 섬길 뿐이니라." 왕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여러 스님을 찾다가 담시의 발이 얼굴보다 흰 것을 보고 곧 그를 섬겼다.

진(晋)나라 말년에 북방의 흉노(凶奴) 혁련발발차지(赫連勃勃嗟之)가 사문을 모두 내쫓았으나 죽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담시는 그 때 산과 늪에 숨어 두타(頭陀)의 행을 닦았다. 뒤에 척발도(拓跋燾)가 다시 장안을 빼앗아 관중(關中)과 낙양(洛陽)에 위세를 떨쳤다. 그 때 박릉(博陵)의 최호(崔皓)는 젊어서부터 좌도(左道)를 익혀 석교(釋敎)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가 보상 자리에 오르자 척발도에게 신망을 받고 곧 천사(天師) 구씨(寇氏)와 더불어 척발도에게 부처님의 교화는 이익은 없고 백성을 해치는 해만 있다고 하여, 그를 권해 불법을 폐하게 했다.

척발도는 그 말에 감동하여 위위(僞魏)의 태평(太平) 7년에 드디어 불법을 훼멸(毁滅)하기로 했다. 그래서 군사를 사방에 보내어 절들을 불사르고 노략질하였으며 승니(僧尼)들에게는 모두 도를 닦지 못하게 했다. 누구나 달아나 숨는 자가 있으면 사람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고 잡힌 자는 반드시 목을 베어 나무 같은 데에 매달았으므로 온 나라 안에 다시는 사문이라고는 없었다. 담시는 깊숙한 곳에 고요히 있었으므로 군사들이 미치지 못했었다.

태평(太平) 말년에 담시는 척발도를 교화할 때가 왔음을 알고 원회(元會)의 날에 갑자기 석장(錫杖)을 이끌고 궁문으로 갔다. 유사(有司)가 왕(척발도)에게 아뢰었다. "발이 얼굴보다 더 하얀 어떤 도인이 궁문으로 들어옵니다."

척발도는 군법에 의해 처결하라 했다. 유사가 칼로 여러 번 쳤으나 담시는 전혀 상하지 않았다. 유사가 황급히 이 사실을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는 크게 화를 내어 스스로 차고 있던 칼로 쳤으나, 담시의 몸에는 다른 이상은 없고, 오직 칼에 맞은 흔적으로 삼베 올과 같은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북쪽 동산에 호랑이를 기르는 우리가 있었다. 척발도는 호랑이가 담시를 잡아먹게 했다. 그러나 호랑이들은 다 그 앞에 엎드린 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척발도는 시험 삼아 천사(天師)를 우리에 가까이 가게 했더니 호랑이는 곧 으르렁거렸다.

척발도는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는 뛰어나 황로(黃老)가 미칠 바가 못됨을 깨닫고, 곧 담시를 전상(殿上)으로 맞이하여 그 발아래 정례(頂禮)하고 믿음이 없었음을 참회했다. 담시는 그를 위해 설법하여 인과(因果)에 대하여 밝게 설명했다. 척발도는 크게 부끄러워하였는데 그 때문에 역병(疫病)에 걸렸고, 다음에는 최호와 구씨 두 사람도 나쁜 병에 걸렸다. 그러나 척발도는 이 허물이 모두 저들 때문이라 하여 저 두 가문을 모두 멸망시켜 그 일족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리고 온 나라에 조서를 내려 불교를 다시 일으키게 하였으나 얼마 후에 척발도는 죽었다. 그 손자 준(濬)이 왕위에 올라 비로소 크게 불법을 펴 지금까지 성행하였다. 담시는 그 뒤에 어디서 죽었는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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