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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 1~6권(원효대사) (大乘起信論[疏] 記會本)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09-01-13 (화) 11:33 조회 : 2636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 記會本) 제 1~6권.hwp (253.1K), Down : 148, 2009-01-13 11:3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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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 1~6권(원효대사) (大乘起信論[疏] 記會本)

대승기신론소기회본(大乘起信論[疏] 記會本)제 1~6권

대승기신론소기회본 제1권

마명보살(馬鳴菩薩) 지음

양(梁) 천축삼장 진제(眞諦) 한역

해동(海東) 사문 원효(元曉)가 소(疏)와 별기(別記) 추가

조한석 번역

[疏] 앞으로 이 『대승기신론』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첫째 부분은 종체(宗體)를 표방하는 부분[標宗體]이고, 둘째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는 논의 제목을 해석하는 부분[釋題名]이며, 셋째는 본문의 내용을 근간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는 부분[依文顯義]이다.

첫째 종체를 표방함[標宗體]이란, 대승의 체(體)됨[진리, 근본바탕]은 아무런 자취도 없이 공적(空寂)하고 아무런 조짐(기미)도 없이 충허(沖虛)하여 현묘하고 현묘하지만 어찌 만상의 밖에 벗어나 있겠는가? 그리고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오히려 백가의 담론(談論) 속에 있도다. 형상(形像)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지라 5안(眼)으로는 그 몸뚱이를 볼 수 없으며, 말 속에 있지만 4변으로도 그 형상(形狀)을 표현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자니 안이 없을 정도로 작은 곳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없고, 작다고 말하자니 바깥 경계가 없을 정도로 큰 것을 머금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다. 유(有)의 영역에 끌어넣자니 일여(一如)가 이것을 써서 텅 비게 되고, 무(無)의 영역에 귀속시키려 하니 만물이 이것을 타고 일어난다. 이렇게 상대적인 개념으로 그 바탕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하여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別記] 대승의 체여!

탁 트여 있도다! 그것은 마치 태허(太虛)와 같아서 사사로움이 없도다.

드넓도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바다와 같아서 지극히 공평하도다.

지극히 공평하기 때문에 동(動)과 정(靜)이 이것을 따라서 일어나고,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염(染)과 정(淨)이 여기서 녹아버린다. 염과 정이 녹아버리기 때문에 진과 속이 평등하고, 동과 정이 일어나기 때문에 승(昇)과 강(降)이 제자리를 지킨다. 승과 강이 한 데 어우러지기 때문에 감응(感應)의 통로가 소통되며, 진과 속이 평등하기 때문에 사의(思議)의 길이 끊어진다. 사의의 길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을 체득한 사람은 그림자와 메아리를 올라타는 듯하여서 방소(方所)에 걸림이 없고, 감응이 소통되기 때문에 바라는 사람은 명상(名相)을 초월하여 돌아가게 된다. 그림자와 메아리를 올라타는 듯하다는 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는 대상이 아니며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미 명상을 초월했다면 다시 무엇을 초월하고 어디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므로 이런 대승의 체를 이치 아닌 지극한 이치[無理之至理]라고 하며 그렇지 않은 듯하면서 크게 그러한 것[不然之大然]이라고 부른다.

[疏] 제 스스로 두구대사(杜口大士)1)와 목격장부(目擊丈夫)2)가 아닌 이상 뉘라서 말을 여읜 자리에서 대승을 논의할 수 있겠으며, 사려(思慮)가 끊어진 자리에서 깊은 믿음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마명보살께서 인연 없는 중생에게까지 미치는 위대한 자비심[無緣大悲]을 일으켜서, 저 바람과 같이 허망한 무명(無明)이 마음의 바다를 요동쳐서 쉽사리 표류(漂流)함을 가엾게 여기시고 이 본각진성(本覺眞性)이 꿈속에 깊이 잠들어 있어 쉽사리 깨어나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그래서 마명보살께서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지력(智力)으로 이 『대승기신론』을 지으셔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의미심장한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의 오묘한 이치를 찬술(贊述)하여, 배우는 이들이 이 『대승기신론』만 보고도 3장의 요지(要旨)를 골고루 궁구할 수 있게 하시고, 도를 닦는 이들이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영원히 쉬어버리고 마침내는 일심(一心)이라는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셨다.

[別記] 이 『대승기신론』의 내용은 모든 교학의 핵심을 갖추고 있으며, 모든 교학의 단점과 천착하는 부분을 논파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중관론』과 『12문론』 등 중관파의 논서는 모든 집착을 다 논파하고 논파 자체까지도 논파하여 논파하는 주체와 논파하는 대상을 모두 인정하지 않으니, 이를 논파하는 방면으로 치달리기만 하여서 보편적인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논의[往而不徧論]라고 한다. 그리고 『유가론』과 『섭대승론』 등의 유가행파의 논서는 깊고 얕은 이론을 모두 인정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어 놓고는 자신들이 인정한 교법을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했으니, 이를 주기만 하고 빼앗지는 못하는 논의[與而不奪論]라고 한다. 하지만 이『대승기신론』은 지혜로운 측면과 자비로운 측면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깊이 있는 이론과 풍부한 내용을 동시에 담고 있다. 모든 이론을 인정해주면서 동시에 저절로 논파하며, 모든 집착을 논파하고 논파 자체까지도 모두 논파하면서 동시에 (세속제의 측면에서)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음을 고려하고 있다.

‘논파하면서 동시에 불가피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음을 고려하고 있다[而還許]’는 말은 ‘논파에 골몰하는 쪽은 논파가 극에 달하면 결국에는 모두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 측면’을 드러내고 있으며, ‘모든 이론을 인정해 주면서 동시에 저절로 논파한다[而自遣]’는 말은 ‘모든 이론을 다 인정하면 결국에는 모든 이론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측면’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대승기신론』을 모든 논서의 조종(祖宗)이라고 하며 모든 쟁론을 평정(評定)하는 평주(評主)라고 한다.

[疏] 이 『대승기신론』의 내용이 비록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핵심만 간추리면 이렇다.

일심(一心)에서 심생멸문(心生滅門)과 심진여문(心眞如門)의 두 문을 열어서 세존께서 마라야산 정상에서 여러 중생들과 행하신 108가지의 치밀한 힐문과 답변의 핵심을 총괄하였으며, 물든 현상 속에서 청정한 본성을 보여주어서 아유사국에서 승만부인과 문답하신 15개 장의 논의를 모두 종합하였다. 곡림(鵠林)에서 설법하신 일미(一味)의 가르침과 영취산에서 설법하신 무이(無二)의 가르침과 『금고경』과 『대승동성경』에서 설법하신 3신의 극과(極果)에 대한 가르침과 『화엄경』과 『영락경』에서 설법하신 4계(階)와 『대품반야경』과 『대방등대집경』의 탁 트여 걸림없는 진리와 『대승대방등일장경』과 『대승대방등월장경』의 은미하고 비밀스러운 현문(玄門)과 그 나머지 이런 부류의 경전들의 핵심을 하나로 꿰뚫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이 『대승기신론』뿐이다. 그러므로 아래의 논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의 끝없는 이치를 남김없이 담아내려[總攝]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 『대승기신론』을 말해야 한다.”3)

이 『대승기신론』의 의미가 이미 이러하여, 그 내용을 낱낱이 분석하면 한량없고 끝없는 이치가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핵심만 추려보면 2문(門: 心生滅門·心眞如門)과 일심(一心)이라는 진리가 그 요점이 된다. 2문 안에는 모든 이치를 머금고 있으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끝없는 이치는 일심에 모여들어 녹아버린다. 이 때문에 세밀하게 분석하든 요점만을 추리든 문제될 것이 없고, 집착을 논파하든 세제(世諦)의 불가피성을 긍정하든 모순되지 않는다. 세밀하게 분석해도 번잡하지 않고 요점만을 추려도 협착(狹窄)하지 않으며 세속제(世俗諦)의 측면에서 긍정하여도 얻은 것은 없으며 모든 집착을 논파하여도 잃은 것은 없으니, 이것이 바로 마명보살께서 내용상으로 교묘하게 안배한 부분이며 『대승기신론』의 중심 내용이다.

그러나 이 논의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종래의 주석가들 가운데 핵심내용을 간파한 이는 많지 않고, 각자 자신에게 익숙한 견해를 가지고 논의 내용에다 억지로 끌어 붙여서 선입견을 없애고 『기신론』의 내용을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논주인 마명보살의 저술 동기와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근원만 바라보아 지류(支流)를 잃어버리는 지경이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잎사귀만 잡고 줄기는 잃어버리는 격이 되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옷깃을 잘라서 소매를 깁는 모양이 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가지를 끊어다가 뿌리에다 두르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다만 이 『대승기신론』의 본문을 중심에 놓고 방증자료로 제시한 경의 내용을 끌어 붙였으니,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소식(消息)하기를 바랄 따름이다. ‘종체를 표방함’을 마친다.

둘째는 『대승기신론』이라는 논의 제목을 해석하는 부분[釋題名]이다.

‘대승(大乘)’의 대(大)는 법(法)에 해당하는 말로서 ‘널리 포용한다’는 의미이고, 승(乘)은 비유로 붙인 말로서 ‘실어 나르는 기능이 있다’는 의미이다. 대승의 의미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을 따라 말하면 이상과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두 측면에서 자세하게 분석하여 볼 수 있다. 첫 번째 측면은 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입장이고, 두 번째는 논의 내용을 중심으로 규명하는 입장이다.

첫 번째 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입장은 다음과 같다.

『허공장경』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대승이란 한량없고 끝이 없고 한계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에 두루 한다는 의미이니, 이는 비유하자면 마치 허공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성문승과 벽지불과 함께 하지 않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한다. 다음으로 ‘승(乘)’에 대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4섭법(攝法)에 바르게 머묾으로써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수레의 바퀴를 삼고, 10선업(善業)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으로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수레의 바퀴살을 삼고, 수행의 밑천이 되는 공덕을 청정하게 함으로써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수레의 바퀴통으로 삼고, 견고하여 거짓 없고 지극하여 한결같은 뜻[意]으로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수레의 줏대와 비녀장을 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못질하듯이 단도리하기도 하고 못을 뽑듯이 악습(惡習)을 제거하는 기능을 다하기도 하고, 모든 선정과 해탈을 원만히 성취함으로써 열반을 향해 나아가는 수레의 끌채를 삼고, 4무량심으로 이 수레를 끄는 말의 조련사로 삼고, 선지식으로 수레의 말을 모는 기수를 삼고, 때와 때 아님을 아는 것으로 수행의 출발점[發動]으로 삼고, 이 말을 몰아가는 소리 역할을 하는 무상(無常)·고(苦)·공(空)·무아(無我)로써 채찍을 삼고, 보배로운 포승(捕繩) 역할을 하는 7각지(覺支)로써 이 수레를 끄는 말의 가슴걸이를 삼고, 청정한 5안(眼)으로 이 말의 고삐를 삼고, 두루 미치고 진실한 대비(大悲)로 깃발을 삼고, 4정근(正勤)으로 이 수레의 바퀴굄목을 삼고, 4념처(念處)로 흔들림 없이 올곧은 마음을 유지하고, 4신족으로 수행에 속도를 더하고, 뛰어난 5력(力)으로 적진(敵陣)을 살피듯이 수행을 점검하고, 8정도(正道)로써 수행에 힘을 붙여 나아가고, 모든 중생에 대한 걸림없는 지혜로 수레를 삼고, 집착함이 없는 6바라밀을 가지고 일체지(一切智)에 회향하고, 걸림없는 4제(諦)로써 피안에 이르게 되니, 이것이 바로 대승이다.”4)

이 인용문의 요점만 말하자면 이렇다. 이상에서는 20개의 구절을 가지고 비유를 들어 법에다 견주어서 ‘승(乘)’의 의미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 부분의 바로 다음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대승은 모든 부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진리이며, 성문승과 벽지불이 관찰하는 대상이며, 모든 보살이 올라타는 의지처이며, 제석천왕과 범천왕과 호세사천왕(護世四天王)이 반드시 공경하고 예배해야 할 대상이며, 모든 중생이 반드시 공양드려야 할 대상이며, 모든 지혜로운 이들이 반드시 찬탄해야 할 대상이며, 세간의 모든 것들이 돌아가야 할 곳이며, 어떤 마군(魔軍)도 깨뜨릴 수 없는 것이며, 외도들이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며, 세간적인 지혜로 범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5)

이 인용문의 요점만 말하자면 이렇다. 이상에서는 10개의 구절을 가지고 여러 인격에 대비하여 대승(大乘)의 경계를 드러내었다. 다시 논서(論書)의 내용에 의거하여 (대승의 의미에 대하여) 일곱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 부분과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 부분이 있다. 대승에 대한 3종 대의는 아래에서 말하기로 하고, 우선 일곱 가지 측면으로 설명한 대승의 의미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이 일곱 가지 측면에 대한 설명은 근거로 삼는 논서에 따라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대법론(對法論)』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곱 가지의 대성(大性)과 상응하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대성(大性)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말하는가?

첫째는 경대성(境大性)이니, 보살도는 백천(百千) 등의 한량없는 모든 경전의 광대한 교법을 따르는 것으로 경계를 삼기 때문이다.

둘째는 행대성(行大性)이니, 모든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광대한 수행[廣大行]을 바르게 실천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지대성(智大性)이니, 광대한 보특가라와 법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넷째는 정진대성(精進大性)이니, 3대아승기야(大阿僧祇耶) 동안에 실천하기 어려운 수많은 수행을 부지런히 닦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방편선교대성(方便善巧大性)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증득대성(證得大性)이니, 여래의 모든 힘과 무외(無畏) 등의 불공불법(不共佛法)들의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한 공덕을 얻었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업대성(業大性)이니, 생사제(生死際)가 다하도록 보리를 성취하는 등의 모든 일을 보여주어서 광대한 불사(佛事)를 건립하기 때문이다.6)[이 일곱 가지 가운데 첫 번째에서 다섯 번째 내용은 수행과정[因位]상의 설명이고, 여섯, 일곱 번째는 열반을 성취한 지위[果位]를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두 번째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승의 성(性)은, 보살승(菩薩乘)이 일곱 가지 대성(大性)과 상응하기 때문에 대승(大乘)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대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을 말하는가?

첫째는 법대성(法大性)이니, 12분교 가운데 보살장(菩薩藏)에 포함되는 방정7)하고 광대한 가르침을 의미한다.

둘째는 발심대성(發心大性)이니, 이미 무상정등각을 성취하려는 마음을 일으켰다는 의미이다.

셋째는 승해대성(勝解大性)이니, 앞에서 언급한 법대성(法大性)의 경계에 대하여 수승한 신해(信解)를 일으켰다는 의미이다.

넷째는 의락대성(意樂大性)이니, 이미 수승한 해행지(解行地)를 넘어서 정승의락지(淨勝意樂地)에 들어갔다는 의미이다.

다섯째는 자량대성(資糧大性)이니, 복덕(福德)과 지혜(智慧)라는 두 가지 수행의 성취에 필요한 밑천[資糧]을 성취했기 때문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섯째는 시대성(時大性)이니, 3대아승기야(大阿僧祇耶) 동안에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일곱째는 성만대성(成滿大性)이니,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 자체를 의미한다. 성만(成滿)한 보리 자체는 여타의 성만 자체와 비교하여도 견줄 만한 것이 없는데, 하물며 무엇이 이보다 수승하겠는가?”8)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보살지지론(菩薩地持論)』의 대승에 대한 이해도 모두 위의 설명과 같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일곱 가지 가운데 첫 번째 법대성(法大性)에서 여섯 번째 시대성(時大性)까지의 여섯 가지는 모두 원증대성(圓證大性)을 성취하기까지의 수행과정[因]이고, 원증대성은 앞의 여섯 가지 대성(大性)의 수행을 통해 성취한 구경(究竟)의 경지[果]이다.”9)

이상의 내용을 풀어보면 이렇다. 위와 같은 대승에 대하여 7종의 대성(大性)에 입각하여 해설한 두 논서의 견해는, 비록 숫자는 같지만 일곱 가지로 나눈 교의적인 근거는 서로 다르다. 각 논서의 교의적인 근거는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대승(大乘)’에 대한 해석을 마친다.

‘기신(起信)’이라는 말을 논의 이름에 붙인 까닭은 이 『대승기신론』의 내용에 의거하여 중생들의 믿음[信]을 일으키기 때문에 ‘기신(起信)’이라고 말한 것이다. ‘신(信)’은 ‘틀림없이 그렇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이치가 진실로 있다고 믿는다’, ‘수행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면 무궁한 공덕이 생김을 믿는다’는 말이다.

이 가운데 ‘이치가 진실로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체대(體大)’에 대한 믿음이니, 일체법(一切法)에는 불변의 자성이 없음[不可得]을 믿기 때문에 평등법계(平等法界)가 진실로 성취될 수 있음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은 ‘상대(相大)’에 대한 믿음이니, 성공덕(性功德)을 갖추고 있다면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熏: 熏習] 마련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면[相熏] 반드시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다. ‘수행을 통해서 성취하면 무궁한 공덕이 생김을 믿는다’는 말은 바로 용대(用大)에 대한 믿음이니, (수행의 결과로 주어지는 무궁한 공덕으로) 모든 일을 다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든 이 세 가지 믿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불법(佛法)에 들어가서 모든 공덕을 일으키고 모든 마군의 경계[魔境]에서 벗어나 위없는 도[無上道]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화엄경』의 게송에서는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도의 으뜸이며 공덕의 어머니.

모든 선근(善根)은 더 잘 자라게 하고,

모든 의혹을 없애주어

무상도(無上道)를 열어젖힘을 나타내 보여주네.

(중략)

믿음으로 모든 마경을 벗어나

위없는 해탈도(解脫道)를 나타내 보여줄 수 있으며,

(믿음이라는) 모든 공덕의 깨어지지 않는 씨앗에서

위없는 보리의 나무[無上菩提樹]가 태어나고 자라네.”10)

믿음은 이상과 같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대승기신론』에 의지하면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려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을 일으킨다[起信]’라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논(論)’이라는 말은,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확실한 내용과 논리를 구축하고 결정하여 심오한 법상(法相)의 도리11)를 분야별로 가르고 설명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결정하고 가른다는 의미에 입각하여 ‘논(論)’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상의 내용을 총괄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대승(大乘)’은 이 논의 종체를 의미하고 ‘기신(起信)’은 이 논의 뛰어난 기능을 의미하니, 종체[體]와 기능[用]을 동시에 제시하여 제목으로 내걸었기 때문에 『대승기신론』이라고 부른다.

[疏] △ 세 번째 부분은 본문을 해석하는 부분이다. 이 논의 본문은 우선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처음의 3행으로 구성된 게송은 3보에 귀의하여 공경하며 이 논(論)을 짓게 된 동기를 술회(述懷)하는 내용[歸敬述意]이다.

둘째, ‘논왈(論曰)’ 이하는 이 『대승기신론』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부분이다.

셋째, 맨 마지막의 한 게송은 이상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마무리하면서 회향(迴向)하는 부분이다.

△ 처음의 3행으로 구성된 게송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앞의 2행 게송은 3보에 귀의하는 내용이고, 마지막 행의 게송은 논을 짓게 된 동기를 술회하는 내용이다.

[論] 온 시방에서 가장 수승한 업(業)과 두루 하는 지혜와, 색(色)이 걸림이 없이 자재하신 구세(救世)의 대비(大悲)하신 이와 그 법신(法身)의 체(體)와 상(相)이신 법성진여해(法性眞如海)의 한량없는 공덕의 창고[無量功德藏]와 여실수행(如實修行) 등에 귀명(歸命)하옵나니,

[疏] 논의 첫 번째 부분인 3보에 귀경하는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귀명’ 두 글자는 ‘귀경하는 주체의 의지표명[能歸相]’이고, ‘온 시방’ 이하는 ‘귀경해야 할 대상인 공덕[所歸德]’을 드러낸다.

‘능귀상’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귀’의 의미는 ‘공경하며 따른다’는 의미이며, ‘향하여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명(命)’은 ‘명근(命根)’을 말한다. 이 명근은 모든 감각기관을 제어하여 온 몸의 요처 가운데 오로지 명근만이 주인 역할을 하며 모든 살아있는 것에게 이 명근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둘도 없는 이 명근을 가지고 가장 존귀한 3보를 받들어 신심의 지극함을 나타내었다. 그래서 ‘귀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귀명’은 ‘환원(還源)한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중생의 6근(根)은 일심(一心)으로부터 일어나 근원을 등지고 6진(塵) 경계로 치달려 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제는 온 목숨을 다해 6정(情)을 모두 거두어들여서 근본자리인 일심의 근원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에 ‘귀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귀명의 대상이자 목적지인 일심 그대로가 3보이기 때문이다.

‘온 시방’ 이하는 ‘귀경해야 할 대상인 공덕’을 드러낸다. 여기서 3보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해야 하는데 그 의미는 별도로 설명한 것과 같다. 여기서는 우선 논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설하겠다. 이 부분의 본문에는 세 가지 주제가 있으니 바로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이다.

우선 불보에 대한 게송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심덕에 대한 찬탄[歎心德]’이고, 둘째는 ‘색덕에 대한 찬탄[歎色德]’이며, 세 번째 구절은 ‘불법을 성취한 인격을 기준으로 하여 찬탄하는 내용을 매듭지음[擧人結歎]’이다.

‘심덕에 대한 찬탄’ 중에는 용(用)과 체(體)를 찬탄하고 있다. 처음에 말하고 있는 ‘온 시방에서 가장 수승한 업(業)’은 업용(業用)을 찬탄하는 내용이니, 이는 ‘8상(相) 등을 나타내어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업(業)’을 의미한다. 이 업으로 시방계(十方界)를 다하고 삼세제(三世際)에 두루 미쳐서 교화할 수 있는 모든 중생에게 수순(隨順)하여 불사(佛事)를 완수하기 때문에 ‘온 시방에서 가장 수승한 업’이라고 말한 것이다. 예컨대 『대법론(對法論)』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업대성(業大性)이란, 생사제(生死際)가 다하도록 보리를 성취하는 일들을 보여 주어 모든 불사를 건립하기 때문이다.”12)

『대법론』에서는 삼세를 제시하면서 업을 말했고, 이 『기신론』에서는 시방을 들먹이면서 업에 대해 말했다.

‘두루 하는 지혜[徧智]’란 ‘지체(智體)’에 대한 찬탄이다. 업용이 시방에 두루 하는 까닭은 지체(智體)가 어디에나 두루 미치기 때문이다. 지체가 두루 미치기 때문에 ‘두루 미치는 지혜’라고 말한 것이다. 예컨대 『섭대승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 세계[色際]에 두루 하면서도 생(生)·주(住)·멸(滅)의 변이가 없는 것과 같아서, 여래의 지혜도 일체소지(一切所知)에 두루 하면서도 전도되거나 변이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심덕(心德)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두 번째는 색덕에 대한 찬탄이다. 색덕에 대한 찬탄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색이 걸림이 없다[色無礙]’는 말은 색체(色體)의 묘함에 대한 찬탄이며, ‘자재하다’는 말은 색용(色用)의 뛰어남에 대한 찬탄이다.

첫째 ‘색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여래의 색신은 만행을 통해서 성취한 결과이며, 부사의한 훈습[不思議熏習]을 통해서 성취한 결과이기에 비록 묘색(妙色)이 있기는 하지만 장애는 없다. 32상과 80종호의 모든 부분에 한계가 없기 때문에 ‘색이 걸림이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예컨대 『화엄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허공의 끝을 찾으려 들면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부처님의 한 모공(毛孔), 한도 끝도 없어라.

부처님의 덕이여! 이 정도로 헤아릴 수 없어라.

그래서 이런 경지를 여래의 청정한 지견(知見)이라고 부른다.”13)

비록 장애가 되는 물질적인 바탕[質礙]은 없지만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뜻[義: 이치]이 있기 때문에 ‘색이면서도 걸림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자재(自在)’는 ‘색용(色用)’에 대한 찬탄으로서, ‘5근이 서로 작용한다[五根互用]’ 혹은 ‘10신이 서로 작용한다[十身相作]’는 의미이다. 그래서 ‘색이 자재하다’고 말한 것이다. ‘5근이 서로 작용한다’는 것은 『열반경(涅槃經)』의 8자재(自在)14) 중에서 말한 것15)과 같고, ‘10신(身)이 서로 작용한다’는 것은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상으로 색덕(色德)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세상을 구제하는 대비하신 이[救世大悲者]’란 세 번째 구절인 ‘불법을 성

취한 인격을 기준으로 하여 찬탄하는 내용을 매듭지음[擧人結歎]’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법화경』의 비유에 맞추어보자면) 부처님은 대장자(大長子)와 같아서 중생을 자식으로 여기기 때문에 삼계(三界)라는 화택(火宅)으로 들어가서 불에 타버릴 위기에 직면한 중생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해주기 때문에 ‘구세(救世)’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을 구제하는 덕’이 바로 대비(大悲)인데, 이는 자타(自他)의 분별을 초월한 자비이며, 인연 없는 중생에게까지 미치는 자비(慈悲)로서 모든 자비 가운데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대비’라고 말한 것이다. 부처님의 경지에서 발현하는 모든 공덕 가운데서, 여래는 오로지 대비만을 힘으로 삼기 때문에 이 ‘대비’만을 제시하여 ‘부처라는 인격[佛人]’을 드러내었다. 예컨대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범인(凡人)과 성인의 힘에는 여섯 가지가 있다. 이 여섯 가지 힘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어린아이는 울음으로써 힘을 삼으니, 마음 속에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선 울음부터 터뜨린다. 여인은 성냄으로써 힘을 삼으니, 성내고 난 뒤에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사문(沙門)과 바라문(婆羅門)은 참는 것으로써 힘을 삼으니, 항상 남에게 자신을 낮추는 마음을 챙긴 뒤에 할 말을 한다. 국왕은 교만함으로써 힘을 삼으니, 큰 세력[豪勢]을 가지고 할 말을 한다. 아라한(阿羅漢)은 한결같은 정진(精進)으로써 힘을 삼아서 할 말을 한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대비로써 힘을 삼아서 중생에게 널리 이익 되게 한다.”16)

이로써 모든 부처님은 대비로써 힘을 삼기 때문에 부처님의 ‘인격’을 표시하려고 ‘대비자’라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상 세 구절로 불보(佛寶)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이 아래의 두 구절은 법보(法寶)에 대하여 찬탄하는 게송이다.

‘그 법신의 체와 상[及彼身體相]’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여래의 몸 그대로가 바로 보신불(報身佛)임을 의미하는데, 바로 법계(法界)를 가지고 자기 자신[自體]을 삼기 때문에 ‘그 몸의 체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구절은 겉으로는 ‘부처’를 제시하면서 의미상으로는 ‘법보’를 취한 부분이다.

바로 아래의 ‘법성진여의 바다[法性眞如海]’ 구절에서는 법보의 체상(體

相)을 바로 표시하였다.

‘법성(法性)’이라고 말한 것은 열반을 의미한다. 이 열반이 법의 본성이기 때문에 ‘법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지도론(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법(法)은 열반을 말하는데, 희론(戱論)이 없는 법을 말하고, 성(性)은 본분의 종자[本分種]를 의미한다. 비유하면, 누런 돌에는 금의 성질[金性]이 있고, 흰 돌에는 은의 성질[銀性]이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법(一切法)의 내면에는 열반이라는 본성이 있다.”17)

이런 이유 때문에 법성(法性)이라고 말한 것이다. ‘진여(眞如)’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다. 버릴 것 없음을 진(眞)이라 하고[無遣曰眞] 세울 것 없음을 여(如)라고 한다[無立曰如]. 아래의 내용18) 가운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진여의 체는 버릴 만한 것이 없으니 일체법이 모두 진실하기[眞] 때문이며, 또한 세울 만할 것도 없으니 일체법이 모두 같기[如] 때문이다. 일체법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도 없기 때문에 ‘진여(眞如)’라고 이름한다.”

‘바다[海]’라는 말은 비유를 들어 법(法)을 표현한 것이다. 대략적으로 설명하면 ‘바다’라는 비유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매우 깊다’는 의미이며, 둘째는 ‘넓고 크다’는 의미이며, 셋째는 ‘온갖 보배가 무궁하다’는 의미이며, 넷째는 ‘온갖 형상(形像)이 그 속에 그림자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진여의 큰 바다도 또한 이와 같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여의 큰 바다는, 모든 분별[百非]을 영원히 끊기 때문이며,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이며, 어떠한 덕도 갖추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며, 어떠한 영상(影像)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법성진여해(法性眞如海)’라고 말한 것이다. 예컨대 『화엄경(華嚴經)』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유컨대, 마치 깊고 큰 바다 속에는 보배가 무궁무진하여 그 속에 중생의 영상[形類像]을 모두 나타냄과 같이, 매우 깊은 인연의 바다 속에는 공덕이라는 보배가 무궁무진하여 청정한 법신(法身) 가운데 어떠한 영상도 나타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19)

이상으로 법보에 대한 찬탄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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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 2015-10-04 (일)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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