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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스님의 서장 (書狀) 강의 개강 - 10월 29일 일요일 오후 1시 .
글쓴이 : 백련사 날짜 : 2017-09-23 (토) 10:18 조회 :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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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의 서장이란 ?

 

서장의 장점 4가지.

- (무심선원 선원장 김태완 박사)

 

1. 조사선과 간화선의 본질을 잘 밝히고 있다.

2. 선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한 선 공부의 지침서이다.

3. 공부에 관한 지도가 매우 구체적이고 친절하다.

4. 옳지 않는 견해와 잘못된 공부의 여러 사례를 열거하여 그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동시에 올바른 견해와 공부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 (10891163) - 출처:불교신문 -

 

간화선의 창시자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선사는 선주(宣州) 안국현(安國縣) 사람으로, 속성은 해()씨이다. 13세에 학교에 들어가 유학을 배우다가 16세에 동산(東山) 자운원(慈雲院) 혜제(慧齊)선사에게 출가 삭발하고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스님이 살고 있던 송대(北宋 9601127, 南宋 11271279) 불교는 당대(唐代, 618906) 불교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창조적이며 풍부한 사회적 활력을 가지고 당대(唐代) 불교를 이끌었던 조사선은 북송 시대에 이르면 새로운 발전을 하지 못하고 당대 불교의 범주안에서 맴돌며 이전의 형식만을 답습하게 된다. 12세기의 남송은 선불교가 가장 활발하게 꽃피었던 당()과 오대(五代, 907960)를 지나 성리학(性理學)이 시대적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주희(朱熹, 11301200)를 대표로 한 이 시대의 성리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스님은 불교가 이미 시대를 이끌어 가는 힘을 상실해 가는 시대의 인물이다. 스님 자신도 시대적 주도권이 이미 성리학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양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님은 성리학이 주도하고 있는 현실세계 내에서 자리잡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포기하고, 송대(宋代) 불교의 한계 내에서 현실세계의 심지(心地)를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장악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그의 이러한 의도는 여러 가지의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우선 불교 외적으로는 첫째 성리학에 대해서 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유교적 경향에 병립하는 불교를 사대부들을 통하여 펼치고자 한다. 둘째, 섣부르게 유불일치설을 주장하는 자들을 불교 정체성(正體性)의 차원에서 불교의 이론을 들어 반박하는 모습을 보인다. 셋째, 유교와 다른 불교의 이론의 틀을 성리학적 세계관과 불교적 지적 토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들에게 설명한다. 넷째,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불교가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강력하고 혁신적이고 생동감 있는 즉세간적(卽世間的)인 간화선(看話禪)을 주장한다. 다섯째, 불교 내적으로는 묵묵(默默)히 반조(返照)하는 것만을 강조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이라고 생각되는 묵조선(默照禪)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배타적인 자세를 나타내면서 체제 내의 선명성을 주장하고 있다.

 

송대 숭유억불 속의 종고스님.,

성리학 주도의 현실 딛고 불교가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바로 깨닫는 간화선 주장

 

스님은 설파한다. “요즈음 일종의 머리 깎은 외도(外道)가 있어서 자기(自己) 눈도 밝히지 못하면서, 다만 그대로 사람들로 하여금 죽은 고슴도치처럼 쉬어가고 쉬고 쉬라라고 말한다. 만약 이와 같이 쉬어 간다면 모든 부처가 세상에 출현(出現)하더라도, 또한 쉴 수가 없어서 더욱더 마음으로 하여금 미혹(迷惑)하고 답답할 따름이다.”

 

세간(世間)을 떠나서 따로 불법을 구하지 않는 것이 일상성(日常性)을 주로 하는 중국 조사선의 특징이었다고 보고, 스님은 이러한 본래적 입장을 묵조선(默照禪)이 멀리 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다. 스님에게 있어서 평상시에 도()를 배운다는 것은 다만 역순경계(逆順境界)에 맞닥뜨려서 쓰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평상시에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그 해답으로서 스님이 한결같이 권하고 있는 방법이 곧 간화(看話)이다.

다만 화두(話頭)를 잡아 붙들되, 여러 가지 승묘(勝妙)한 경계(境界)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마음이 놀라지 않고, 여러 가지 악업경계(惡業境界)가 앞에 나타나더라도 마음은 두려움이 없으며, 날로 씀에 인연(因緣)따라 방광(放曠)하여 마음대로 소요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간화선에서의 선()의 의미는 상당히 확장되어 더 이상 몸의 좌선(坐禪)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주위 환경이나 자세에 구애받음 없이 다만 화두(話頭)를 붙잡아드는 것이 중요한 요소로 부각하게 된다.

 

따라서 스님의 간화선에서는 몸의 좌선(坐禪)’에 국한되기 쉬운 좌선(坐禪)’이라는 용어보다도, 오히려 화두를 참구한다는 의미에서 참선(參禪)’이라는 용어가 보다 보편화 되어진다.

 

대혜선사에 의하면 마음을 체증(體證)함은 어렵다. 따라서 스님의 간화선(看話禪) 사상에서는 마음 자체에 대한 것보다도 마음을 체득(體得)하는 방법론적(方法論的)인 면이 더욱 더 강조되어진다. 다시 말해서 두 번 다시 상속심을 일으키지 않도록 무섭게 치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스님은 설파한다. “만약 곧바로 꺾어 이해(理會)하길 바란다면, 반드시 이 한 생각을 단박에 타파하여야 비로소 생사를 요달(了達)할 수 있고, 비로소 깨달음에 들어갔다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해서 간절히 가히 마음을 두어서 타파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한꺼번에 내리누르고 그 내리누른 곳에서 오로지 화두(話頭)만 살펴야 한다. 곧바로 심지(心地)를 경절(徑截)하여 탁 트이고자 한다면, 다만 능()하고 능()하지 못함,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함, 같고 같지 않음, 다르고 다르지 않음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헤아리는 것 따위는 저쪽 세계로 쓸어 버려야 한다.”

 

경절(徑截)이란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과 곧장 가로질러간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돌아가는 방법이 사량분별(思量分別)에 의한 논리적인 설명 방식이라면, 돌아가지 않고 곧장 가로질러간다는 언명(言明)은 사량분별이나, 돌아가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잘라내고 탁 트인 심지(心地)를 곧바로 직관(直觀)하여 드러냄을 뜻한다. 그러므로 긍정적(肯定的)으로는 심지(心地), 즉 경절처(徑截處)를 곧장 드러낸다는 것이요, 부정적(否定的)으로는 사량분별과 생사심(生死心)을 일도양단(一刀兩斷)한다는 의미가 된다.

 

무자공안중시하고, 사량분별 떠나는 경절문강조.

모든 알음알이 단칼에 잘라내고 곧바로 꺾어 깨달으려 하는 것...

 

스님의 선법에는 이때 그 방법으로써의 무자공안(無字公案)’이 중시된다. 그렇지만 스님이 주장하는 것은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무자화두(無字話頭) 자체라기 보다는 무자화두로 가는 길에서의 방법론적 자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심할 것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는 안되며, 다만 하루종일의 행주좌와(行住坐臥)속에서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라는 화두(話頭), 순간 순간 잡아들고 순간 순간 주시해야만 한다.

 

만약 일상생활(日常生活)을 떠나 따로 나갈 곳이 있다면 이는 파도를 떠나 물을 구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경각(究竟覺)을 구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외도(外道)의 무리가 있으니, 스님에 의하면, 그들은 다름 아닌 묵조선(默照禪)을 주장하는 무리다.

 

스님은 표면적으로는 묵조선(默照禪)을 힐난하지만, 사실은 묵조선을 빌미로 하여, 모든 대오선(待悟禪)을 배격한다. 왜냐하면 묵묵(默默)히 않아 좌선(坐禪)만 하게 되면 고목(枯木)의 선()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이 문제를 간화(看話)라는 방법론적 자각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님은 먼저 의단(疑團), 즉 핵심이 되는 언구(言句)에 대한 의심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때 의심의 대상으로서의 언구(言句)는 무자화두(無字話頭) 일구(一句)이다. 이 일구(一句)인 화두(話頭)를 통해서 모든 알음알이를 단칼에 잘라내고 곧바로 꺾어 깨달아 알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혜 간화선의 진정한 의의는 공안(公案)보다는 간화(看話)에 있다. 왜냐하면 조사들의 남겨진 고칙(古則)으로서의 공안은 수행하는 납자(衲子)의 가슴에서 화두로 자리잡을 때에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화두는 존재자(存在者)인 인간이 그가 주인공(主人公)임을 깨닫는 계기로서 작용을 하게 된다. 손님을 주인으로 알고 손님에게 내주었던 방을 도로 되찾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각(本覺)의 입장에만 집착하여 깨침을 무분별하고 무책임하게 수용하는 태도는, 시각(始覺)의 입장에서 의단(疑團)을 주요한 방법으로 하는 대혜선사의 간화선적(看話禪的)인 시각(始覺)에 의하면 사마외도(邪魔外道)가 되는 것이다. 결국 조주(趙州)선사의 무자(無字), 그 본의(本意)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혜선사에 의해서 발전적으로 재해석된다고 볼 수 있다

 


출처:차원을 넘어서(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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